"교단 곳곳이 다 여래원이 돼야 한다"
원기26년(1941)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전국교리강연대회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선진들과 함께 대회를 겨루게 된 열일곱 살 소녀는 당당히 '생사대사'를 주제로 소태산 대종사 앞에서 강연을 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오늘 저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생사대사의 진리를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칭찬하며 '특등'의 점수를 내렸다.
그때 그 소녀는 이제 구순하고도 한 해를 더 지내고 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아왔던 생사대사를 〈죽음의 길을 어떻게 잘 다녀올까〉라는 책으로 출판해 2만여 부 판매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적한 수도원에서 교단의 큰 스승으로, 생사해탈 공부에만 정진해 가고 있다. 그가 바로 예타원 전이창(睿陀圓 全二昌) 종사다.
때 이른 폭염으로 수도원의 아침 공기는 열기로 가득 찼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김도준 예비교무(4학년)와 찾은 전이창 종사의 방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 평범했다. 불쑥 찾아온 후진들에게 "난 이제 할 말도 없는데 왜 왔어?" 하고 손사래 치시더니 못 이긴 척 맞아준다. 연신 부채질을 하며 가만가만 말을 잇다가 숨이 차면 다시 호흡을 골라 어렵사리 말을 잇는 전이창 종사. 그는 "예전에는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지만 이제는 '여래원(如來院)'이 됐으면 한다"는 말로 그 옛날 소태산 대종사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시기로 돌아갔다.
- 소태산 대종사와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16살 때 출가해서 영산에서 처음 뵀다. 영산 선진포 나루에 배가 도착하고 대종사께서 나오시니 대중이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이 분은 정말 큰 어른이신가 보다' 하고 느낌만 받았다."
- 그 후 법명에 얽힌 만남이 이어졌다죠.
"대종사께서 영산에 오신 때다. 하루는 빙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옆에 있던 동지가 '이창이는 자기 법명이 안 좋다고 합니다'라고 평소 내가 했던 말을 대종사께 옮겼다. 우리는 대종사께서 법명을 다 지어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대종사께서 '좋다야, 어째서 안 좋다고 하냐. 우리가 이사병행하고 신앙과 수행을 아울러 닦아야지 한 가지만 하면 쓰겠냐. 이창(二昌)이 이름 좋다'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는 이름 가지고 두 마음 내지 않았다."
- 이듬해 총부 교리강연대회에 나가서 특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초고는 내가 썼지만 정산종사께서 원고를 정리해 주고 발표 지도도 해주었다. 혼자 힘으로 된 게 아니다."
- 어떤 내용이었나요.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결혼식을 다녔는데 항상 축의금을 챙겨 들고 인사하기를 '남의 집에 대사 치르러 다녀올게'라고 했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이 인간대사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출가해서 공부해 보니 '생사대사'가 참으로 큰 대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강연장에서 내가 생사대사를 알게 된 것은 '모두 대종사의 은혜입니다'라며 큰 절을 했더니 대중이 박수를 치고 감동을 했다. 대종사께서도 아마 17살 선원생이 생사대사를 말하니 기특하게 여긴 것 같다. 그때 하신 말씀이 '내가 팔인 단원과 언을 막을 때 저 사람들을 언제 가르쳐서 혈심제자로 만들까,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 저 어린 아이 입에서 생사대사 이야기가 나오니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이튿날 영산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인사하러 가니 대종사께서 '너 꼬리 날까 싶다'며 혹여 내가 우쭐할까 싶어 염려해 주셨다. 그 자리가 대종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년 후 원기28년 6월에 대종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영산사무소를 지키느라 총부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일찍 떠나실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 뵙기라도 했을 텐데…. 그때 자주 뵙지 못한 게 지금도 못내 아쉽다."
- 예타원님에게 대종사는 어떤 성자인가요.
"대종사께서 계셔서 우리 삶이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대종사님의 은혜라고 믿고 살았다."
- 기도에 대해 한마디 부탁합니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 표준을 크게 잡아가야 한다. 신앙이나 수행이나 큰 표준아래 닦아가야 크게 이룬다."
- 수도원을 여래원으로 만들자고 했다죠.
"평소에 나는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왕 여래가 되자고 온 사람들인데 여기가 여래원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 생활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이 좋은 곳에서 살 때 여래를 표준삼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될 수 있다. 소태산 여래께서 그렇게 법을 만들어 주셨다. 여기 뿐 아니라 총부도 교단도 다 여래원이 돼야 한다. 그것을 하고 안 하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여래 되는 공부를 어떻게 할까요.
"옛날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성출가 하여 수하항마(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음)를 이뤘다. 지금은 수하항마가 아니다. 마구니가 길거리에도 있고, 집에도 있다. 처처에 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 신장이 다 동원하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 동원해서 시험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노(路)중 항마를 하고, 가(家)중 항마를 해야 한다. 처처마다 항마를 해야 한다. 그래야 여래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 표준이 소태산 대종사가 염원한 '천여래만보살 세상'이다. 그런 회상을 만났으니 우리가 다 여래를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여래가 될 수 있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 노력만이 답이네요.
"그게 진리니까.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성공을 할 수 있고 진리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열심히 해야 한다. 하여간 대중 있게 까닭만 잡고 나가면 진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정성껏 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진리는 조금도 거짓이 없고 틀림이 없다. 노력한 만큼 와진다. 한 까닭만 잡고 적공을 해라. 그럼 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