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곳곳이 다 여래원이 돼야 한다"

6월 추모의 달을 맞아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한 제자와의 만남을 기획했다. 친견 당시의 심경과 에피소드를 듣고 그 후로 스승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왔는지 선·후진의 만남을 통해 들어보았다. 1주 예타원 전이창 종사와 김도준 예비교무, 2주 연타원 성보영 정토와 이성진 새내기 정토, 3주 노산 전성완 종사와 조상원 예비교무, 4주 융산 송천은 종사와 정현인 교무가 함께했다. (편집자 주)

▲ 전이창 종사는 원기26년에 열린 전국교리강연대회에서 '생사대사'를 주제로 강연해 특등했다.


원기26년(1941)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전국교리강연대회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선진들과 함께 대회를 겨루게 된 열일곱 살 소녀는 당당히 '생사대사'를 주제로 소태산 대종사 앞에서 강연을 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오늘 저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생사대사의 진리를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칭찬하며 '특등'의 점수를 내렸다.

그때 그 소녀는 이제 구순하고도 한 해를 더 지내고 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아왔던 생사대사를 〈죽음의 길을 어떻게 잘 다녀올까〉라는 책으로 출판해 2만여 부 판매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적한 수도원에서 교단의 큰 스승으로, 생사해탈 공부에만 정진해 가고 있다. 그가 바로 예타원 전이창(睿陀圓 全二昌) 종사다.

때 이른 폭염으로 수도원의 아침 공기는 열기로 가득 찼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김도준 예비교무(4학년)와 찾은 전이창 종사의 방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 평범했다. 불쑥 찾아온 후진들에게 "난 이제 할 말도 없는데 왜 왔어?" 하고 손사래 치시더니 못 이긴 척 맞아준다. 연신 부채질을 하며 가만가만 말을 잇다가 숨이 차면 다시 호흡을 골라 어렵사리 말을 잇는 전이창 종사. 그는 "예전에는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지만 이제는 '여래원(如來院)'이 됐으면 한다"는 말로 그 옛날 소태산 대종사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시기로 돌아갔다.

- 소태산 대종사와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16살 때 출가해서 영산에서 처음 뵀다. 영산 선진포 나루에 배가 도착하고 대종사께서 나오시니 대중이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이 분은 정말 큰 어른이신가 보다' 하고 느낌만 받았다."

- 그 후 법명에 얽힌 만남이 이어졌다죠.

"대종사께서 영산에 오신 때다. 하루는 빙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옆에 있던 동지가 '이창이는 자기 법명이 안 좋다고 합니다'라고 평소 내가 했던 말을 대종사께 옮겼다. 우리는 대종사께서 법명을 다 지어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대종사께서 '좋다야, 어째서 안 좋다고 하냐. 우리가 이사병행하고 신앙과 수행을 아울러 닦아야지 한 가지만 하면 쓰겠냐. 이창(二昌)이 이름 좋다'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는 이름 가지고 두 마음 내지 않았다."

- 이듬해 총부 교리강연대회에 나가서 특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초고는 내가 썼지만 정산종사께서 원고를 정리해 주고 발표 지도도 해주었다. 혼자 힘으로 된 게 아니다."

- 어떤 내용이었나요.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결혼식을 다녔는데 항상 축의금을 챙겨 들고 인사하기를 '남의 집에 대사 치르러 다녀올게'라고 했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이 인간대사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출가해서 공부해 보니 '생사대사'가 참으로 큰 대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강연장에서 내가 생사대사를 알게 된 것은 '모두 대종사의 은혜입니다'라며 큰 절을 했더니 대중이 박수를 치고 감동을 했다. 대종사께서도 아마 17살 선원생이 생사대사를 말하니 기특하게 여긴 것 같다. 그때 하신 말씀이 '내가 팔인 단원과 언을 막을 때 저 사람들을 언제 가르쳐서 혈심제자로 만들까,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 저 어린 아이 입에서 생사대사 이야기가 나오니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이튿날 영산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인사하러 가니 대종사께서 '너 꼬리 날까 싶다'며 혹여 내가 우쭐할까 싶어 염려해 주셨다. 그 자리가 대종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년 후 원기28년 6월에 대종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영산사무소를 지키느라 총부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일찍 떠나실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 뵙기라도 했을 텐데…. 그때 자주 뵙지 못한 게 지금도 못내 아쉽다."

- 예타원님에게 대종사는 어떤 성자인가요.

"대종사께서 계셔서 우리 삶이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대종사님의 은혜라고 믿고 살았다."

- 기도에 대해 한마디 부탁합니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 표준을 크게 잡아가야 한다. 신앙이나 수행이나 큰 표준아래 닦아가야 크게 이룬다."

- 수도원을 여래원으로 만들자고 했다죠.

"평소에 나는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왕 여래가 되자고 온 사람들인데 여기가 여래원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 생활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이 좋은 곳에서 살 때 여래를 표준삼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될 수 있다. 소태산 여래께서 그렇게 법을 만들어 주셨다. 여기 뿐 아니라 총부도 교단도 다 여래원이 돼야 한다. 그것을 하고 안 하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여래 되는 공부를 어떻게 할까요.

"옛날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성출가 하여 수하항마(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음)를 이뤘다. 지금은 수하항마가 아니다. 마구니가 길거리에도 있고, 집에도 있다. 처처에 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 신장이 다 동원하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 동원해서 시험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노(路)중 항마를 하고, 가(家)중 항마를 해야 한다. 처처마다 항마를 해야 한다. 그래야 여래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 표준이 소태산 대종사가 염원한 '천여래만보살 세상'이다. 그런 회상을 만났으니 우리가 다 여래를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여래가 될 수 있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 노력만이 답이네요.

"그게 진리니까.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성공을 할 수 있고 진리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열심히 해야 한다. 하여간 대중 있게 까닭만 잡고 나가면 진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정성껏 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진리는 조금도 거짓이 없고 틀림이 없다. 노력한 만큼 와진다. 한 까닭만 잡고 적공을 해라. 그럼 잘된다."

▲ 전이창 종사와 김도준 예비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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