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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호 원로교무 / 초발심의 대원으로 일생 정진
송명호 원로교무 / 초발심의 대원으로 일생 정진
  • 정리=이성심 기자
  • 승인 2015.06.05
  • 호수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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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대불공
▲ 송명호 원로교무
태어나던 해 원기24년 익산교당에서 이대교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면타원 송명호(免陀圓 宋明鎬) 원로교무. 유년시절부터 평범한 삶이 아닌 좀 더 거룩한 삶을 살고자 염원했다. 전무출신을 목적하고 성장하는 듯 순한 성품으로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학생법회에 개근할 정도로 법회를 소중히 했고, 교우들에게도 늘 희생적이고 정의로웠다.

원기49년 간사를 거치지 않고 원불교학과에 입학, 일가친척 중 법동지가 없어 비교적 인연의 궁핍함이 있었으나 선배들의 보살핌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수학 중에는 유무념 공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 발전과 기질변화에 노력하며 드러나지 않게 독공을 하기도 했다.

출가식 이후 근무지는 영산선원, 보성교당, 중앙총부, 강화·안양·초량·삼덕·동래·중구교당에서 열과 성을 다하며 교화에 임했다. 초창기 기관과 교당에 근무하면서 힘에 버거운 작업 등에 서러움도 많이 느꼈다.

북한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군부대가 많은 곳에서는 생활환경이 척박했다. 특히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일은 30대의 젊은 교무로서 여간 곤혹스런 일이었다. 오직 서원의 힘으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 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뿌리내리지 못한 초창 교도들의 불공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실지불공과 정성으로 교당을 신축하고 화합의 기쁨으로 교도들의 세정을 살폈다. 출가의 진정한 기쁨과 다행함을 알아갔으며 이 모든 환경을 감내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다.

인생 중반에 이르러 발령받아 가는 교화지마다 화합하며 즐겁게 근무했다. 교도 선후진간 우애와 친밀함에 정성을 다하며 교당 기운이 늘 편안하게 했다. 역사가 있는 교당의 건축도 이룩했으며, 당하는 교당마다 개축하고 정돈하여 질서 있는 공가생활을 했다. 특히 기도하고 수행하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교도훈련으로 교화하니 남자 교도들의 증가로 단별 훈련장소를 마련한 것은 일생 교화지에서의 큰 성과라 하겠다.

인생 초반의 교화지는 초창기 교당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중반의 교화는 역사 깊고 비교적 안정된 신심 깊은 교도들이 밑받침이 되어주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든지 교화라는 자신감이 섰고 성심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진의 교화가 바로 인생 후반기의 교화라고 여겨진다. 그 결과 한 교당에서는 청소년 법당 마련과 법위향상을 위해 노력해 정사 배출에 열중했다. 여래를 향한 끊임없는 적공의 주인공을 만나 같이 정진 할 수 있었다. 교당과 교구, 교단이 하나인 공심의 주역이 되도록 노력하고 일생 살아온 감사와 참회의 밑거름이 무난한 교역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초창의 간고한 교무시절을 젊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초발심의 대원이 변함없다면 우리 교무로서의 일생은 참으로 가치있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해는 지는데 돌아 갈 곳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서글플 것인가. 수도원은 자랑스러운 선진님들의 넓고 포근한 자비의 품이다. 이곳에서 대공심(大空心) 대공심(大公心)의 주역이 되어 참으로 조용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내 영생의 최후일념을 기르고자 한다.

행여 아닌 것이 보이고, 원망이 생기고, 나태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신 단속에 정성을 다하며 대효와 대신성 대공심 대참회로 정진하고, 대서원의 불빛이 영원하도록 최후의 일념을 늘 챙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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