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발분으로 정진하도록 기운 북돋워

▲ 부처는 누구이며- 서심덕 교무 작.
139장) 부처는 누구이며
                                           손정윤 작사 / 김동진 작곡

1.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는 하나라네
    구름이 흩어지면 푸른하늘 비치듯이
    본래 자리 깨고 보면 우리도 부처라네

2.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는 하나라네
    사랑과 미움이야 연잎의 이슬이라
    한 마음 찾고 보면 우리도 부처라네

바다와 파도

〈성가〉 139장 '부처는 누구이며'는 효산 손정윤 교무가 작사한 노랫말로, 효산은 평소 선시(禪詩)를 즐겼으며 선시를 통해 선의 의문표와 느낌표에 깊은 침잠생활을 했다. 이 성가 139장도 이런 선의 의문표와 느낌표의 선맛이 물씬 풍기는 내공이 깊은 작품이다.

정산종사는 원리편 11장에서 '본래 선악과 염정이 없는 우리의 본성에서 범성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으로, 분별망상은 우리 본성에 밝은 마음이 있기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도도 바닷물이 있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바닷물이 없다면 파도는 처음부터 생길 수 없다. 이 비유의 진의는 바닷물이라는 본체는 파도라는 현상의 존재근거라는 것이다. 바닷물의 본체는 파도라는 현상을 초월해 있고(현상초월성) 파도라는 현상은 바닷물이라는 본체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본체의존성)

'바닷물이 있기에 파도가 있다' 해서 '파도가 없으면 바닷물도 없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바닷물은 풍상이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지만 바닷물이 있다고 반드시 풍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닷물이 있어도 풍상이 없을 수 있으며 혹은 거꾸로 풍상이 없어도 바닷물이 있는 것이다. 결국 바닷물은 풍상이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이 있는 것이다.

본체는 현상이 없어도 있지만, 현상은 본체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 바닷물인 것이다. 다만 바닷물로써 파도인지, 바닷물인줄 모르는 풍상인지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닷물과 파도(풍상)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듯 부처와 중생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이다.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는 하나라네

'구름이 흩어지면 푸른하늘 비치듯이'의 노랫말처럼 푸른하늘의 구름은 형상(形相)이다. 바닷물이 출렁이는 파도라는 형상과 같다. 파도가 본래 바닷물인지 모르고 출렁이는 것이 무명이다. 순간 출렁이는 풍상의 형상을 놓아버리고 바닷물 자체가 되어버리면 파도는 본래 바닷물이 된다.

이처럼 푸른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형상을 놓아버리고 그 배경인 푸른하늘을 직관하면 본래자리에 입정하게 된다. 텅 비어서 밝게 빛나는 입정처의 본성자리를 보게 되며 그 순간 우리가 본래 부처인 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푸른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의 망념은 가상으로, 망념에 따라 일어나는 허망분별이다. 이 구름의 망념을 망념인 줄 알아두고 흘러 보내면 구름의 상(相) 너머의 푸른하늘의 성(性), 생멸상 너머 불생불멸의 진여가 드러나게 된다.

또한 노랫말처럼 사랑과 미움의 분별간택심은 연잎의 이슬과 같다는 것이다. 연잎의 이슬은 늘 흘러내리며 연잎은 이슬에 젖지 않는다. 이처럼 성품은 연잎처럼 분별간택하는 마음에 물들 수 없는 자리이다. 사랑과 미움은 연잎의 이슬처럼 우리의 성품에 출몰하는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형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니 놓아버리면 사라지는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순간 생겼다가 멸하는 무상한 존재이니 이 증애하는 분별심을 간택하고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리면, 간과해 버리면 그 자리에서 청정하게 밝게 빛나는 본래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 본래의 한 마음, 즉 무분별의 지혜를 찾고 보면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원래 부처인 일원(一圓)의 한 마음에 들게 되는 것이다.

원음 산책

〈성가〉 139장 '부처는 누구이며'의 반주를 듣노라면, 어릴 적 친구들과 다정히 옛 골목을 거닐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탐사하는 기분이 든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다음 골목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함에 마냥 어린 시절 그 정겨움에 푹 빠져 드는 기분이 든다.

〈성가〉 139장 '부처는 누구이며'는 첫 소절인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를 어떤 마음으로 부르느냐에 중심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정산종사는 권도편 51장에서 "법강항마위까지는 '부처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하는 큰 발분을 가지고 기운을 돋우며 정진하여야 하고, 법강항마위부터는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하나라는 달관을 가지고 상(相)을 떼고 티를 없애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야 그 공부가 길이 향상된다" 하시며, 법위에 따른 공부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이처럼 보통급·특신급·법마상전급의 삼급(三級)의 법위에서는 부처가 되겠다는 분발의 마음으로 원력을 돋으면서 불러야 할 것이며, 법강항마위 이상 삼위(三位)의 법위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하나라는 넓은 마음을 확장시키는 심정으로 노래해야 할 것이다. 〈성가〉 139장 '부처는 누구이며'는 김동진 작곡으로 원기75년(1990) 교화부에 의해 성가로 제정된다.
▲ 부처는 누구이며- 서심덕 교무 작.



 

 

 

 

 <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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