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 이성로 원로교무
원기32년 영광 도양교당에서 이제운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이성로(91·溫陀圓 李性路) 원로교무. 영광 군남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원기32년 2월 한줄기 향학일념으로 도양교당에서 2년 동안 간사생활 했다. 도양교당은 사시사철 울창한 죽림에 둘러싸인 교화현장이었다. 당시 은타원 조일관 교무를 받들며 초발심으로 살았다.

원기34년 4월 도양교당에서 익산총부로 올라와 대종사의 발자취가 남겨진 성지에서 정산종사를 우러러 모시는 도반들과 출가서원을 다지며 생활했다.

당시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총부 생활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재무부에서 밥 지을 식량을 내 줄 때면 겉보리쌀이 대부분이고 쌀은 조금이었다. 겉보리를 돌확(돌로 만든 절구)에 갈고 갈아 물로 잘 씻어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었다. 땔감은 토탄이었다. 그 토탄에 불을 붙여 풀무로 돌리면서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면 종을 쳐서 구내 대중이 다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수요야회시간에는 총부 식당 방에 50여 대중이 모여 법회를 보았다. 법문은 정산종사께서 해 주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법문이 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지척에 있으나 천리만리 떠나 있는 사람이요, 신심이 독실한 사람은 천리 밖에 있어도 함께 있는 사람이니 항상 어느 곳에서나 남을 위하고 회상을 위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피난은 절로 되리라."

"혼자라도 이 공부 이 사업에 정진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다 비방하고 박해하여도 꿋꿋하게 이 회상을 지키겠는가. 우리 법은 새 세상의 대도이니 안심하라."

정산종사는 법문을 통해 후학들에게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셨다.

원기35년 7월19일 인민군이 황등에서 익산으로 내려오는 기미가 보여 총부 임원들은 정산종사님을 종법실 지하실로 모셨다. 간사인 우리들도 몇 명 들어갔다.

인민군들이 총부로 진입하여 지하실로 와서 우리 앞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모두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무서운 눈초리로 지하실 구석구석을 살피고 그냥 나갔다.

8월3일 인민군들이 총부로 다시 몰려와 "여기에 호남주둔본부를 두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은 즉시 나가라"고 호령했다. 총부 임원들은 가까운 곳을 피난했고 남자부 8명, 여자부 8명이 산업대를 조직해 작업복을 입고 총부에서 작업하는 것으로 총부의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 정산종사는 대각전 불단 옆방을 쓰고 남자부는 대각전, 여자부는 정미소를 사용하였으며, 식당은 정미소를 사용했다.

정산종사는 그 난리 속에서도 좌포에 사는 양보훈(김순익 교무 모친) 씨의 해산달을 아시고 "거긴 위험하니 총부로 나오라"고 하는 등 자비 방편을 베푸셨다.

나는 총부 감원 일을 주로 했다. 총부에 유지답이 없어 조그마한 정미소를 운영했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총부식량이 부족해 때로는 사가에서 쌀을 가져다가 밥을 짓기도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총부를 찾아왔다. 정산종사를 뵙고 내 생활을 둘러보신 후 "네가 선택한 길이니 꼭 성공하라"고 말씀하시고 영광으로 내려가셨다.

당시 부모님은 아침이면 유가의 경을 암송했다. 훗날 집에 가니 우리 독경을 하시고 영주를 외우며 지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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