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법회마다 주차관리
서울역 빨간 밥차 봉사도
가까운 인연일수록
소중하게 대하니 모두가 은혜

나는 어릴 적, 할머니 따라 서울 구경 왔다가 한강대교에서 택시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 후로 예쁘장한 얼굴이 변하고, 말이 없어지고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고를 당한 후로 몇 년이 흐른 뒤 어느 날, 큰형과 함께 윗집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다가 갑자기 몸에 마비가 와서 나무에 짝 달라붙게 되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겨우 땅에 내려와 2년간 온갖 치료를 받고 기적처럼 정상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한글을 깨쳐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내게 막내 삼촌이 과외를 해줘 더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우리 집 옆에서 불이 났는데 바람이 불어 우리 집 지붕에 불이 붙었다. 겁이 나서 소리를 지르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짓 발짓을 하여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말을 해 집이 불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부모와 자식 간에 상생의 선연이 아니었으면 화를 면하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 그때마다 사은의 은혜로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공항장애를 앓고 살았던 것 같다. 항상 신경질적이고 숨이 가쁘고 고통스럽고 생각이 많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늘 피곤하고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 서서 발표도 못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20대 전반까지 이렇듯 혼자 생활하며 죽음만 생각했던 시기였다.

명절 때면 나로 인해 말다툼이 일어나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였다.

한번은 신혼 초에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어머니는 집사람이 없는 줄 알고, "저 성질로 어떻게 결혼생활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 말을 집사람이 들었다. 남편 한 사람만 믿고 시집 온 집사람으로서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어릴 적 문장교당 교도회장인 아버지 그늘에서 자랐지만 결혼 후 자녀 키우고 내 가정 건사하기조차 힘든 삶을 살다 보니 교당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친고모인 정연석 교무님이 신림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제야 4살 된 큰애와 함께 원불교에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덧 25년의 시간을 흘렀고, 나는 교법에 대한 신심보다는 다니는 데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큰애가 중학교 2학년 되던 해에 허리디스크가 발병하여 10년여 동안 고생을 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도 못 다닐 정도로 심하여 9일 동안은 누워만 있을 정도로 심했다. 큰 수술을 받아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후로 3년반이란 세월을 밤낮으로 교전과 책을 가까이하며 마음을 챙겼다. 신심과 공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앞이 캄캄하여 심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건강이란 경계를 통해서 마음이 성장했고, 내 자신도 성장하고 주변도 좋아졌다.

편견과 고정관념,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원불교교전〉과 〈원불교신문〉에서 좋은 내용을 메모하여 보고 또 보아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전의 정상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모습의 내가 되었다.

나는 일요일이면 교당 현관에 서서 교도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주차안내를 한다. 그 세월이 18년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더운 여름에나 한결같이 그 일을 해오고 있다. 또한 원봉공회가 주관하는 서울역 빨간 밥차 봉사도 하고 있다. 3년 정도 참여해 보니 이제는 재미가 붙었다. 땀을 흘리며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올 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낙을 느낀다. 현장에서 일하다가 오후5시까지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수요일이면 지방출장에 가도 그 시간이 되면 묘하게 시간을 맞추게 된다. 이 또한 사은의 은혜라 생각한다.

대종사께서는 "낮은 인연일수록 가까운 데서 생겨나나니 가까운 사이에서 예를 차리지 아니하여 조심하는 생각을 두지 아니하면 서로 생각해준다는 것이 서로 원망을 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가까이 있기에 편안하게 생각하고 예를 차리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살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내가 좀 더 빨리 깨우쳤더라면 인연에 대한 관리를 잘했더라면 나의 삶이 더 윤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두 번 다시 못 만날 소중한 만남에 눈을 뜨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가까운 부모, 친척 형제에게 안부 전하기를 유념으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지금은 형제나 친척들이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덕분에 나도 친지 간에 더욱 뭉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게 됐다. 원불교인의 잠재의식 속에는 일심합력, 사무여한, 무아봉공, 이소성대, 무한신성의 DNA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앞으로도 살고 싶다.

<신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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