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꽃집 아니면 생화 보기 어렵지만, 20년 전만해도 텃밭이며 공터에 붓꽃도 있고 장미도 있어서 꿀도 빨아먹고 장미 가시 코에 붙여 코뿔소마냥 다녔다. 꽃이 천지니 가끔 예쁘면 집에 가져 갔는데, 무정하게도 엄마는 혼을 냈다. '그 꽃 남들도 봐야지'로 시작해서 '너도 누가 갑자기 목 꺾으면 좋겠어?'로 끝나는, 평범한 엄마들의 자녀교육이었다.

'말 못하는 꽃이라도 함부로 해치면 안되는구나'는 대단한 도덕도 엄청난 윤리도 아닌, 그저 상식이다. 그런데 종종 '이거 나한테만 상식인가?'할 때가 있다. 족히 몇 시간은 걸렸을 법한 휘황찬란한 꽃꽂이가, 참으로 많은 교당에, 참으로 자주 있는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꽃을 보면 그 품을 어림할 수 있다. 금요일쯤 일찍부터 꽃시장에 가서는 일일이 골라 싣고 온다. 시든 것들을 골라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놓고 사온 꽃더미를 풀어헤친다. 다 꽂고 나서도 떨어진 부스러기 때문에 마무리 청소는 기본, 대강 봐도 최소 반나절, 사축이재나 초대법회에 앞서서는 족히 하루다. 이걸 한 주에 한번만 하는 것도 아니라, 천도재가 많으면 일주일에 서너번씩도 한다.

의문이 생긴다. 꽃 꽂느라 하루며 이틀 사흘을 쓰는데, 대체 교화는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한참 만나야 교화되는 청소년교화 담당교무들은 그 시간에 꽃을 꽂고 있는데 말이다. 천도재야 상주들의 마음이라 쳐도, 일반법회마저도 꼬박꼬박 그렇게까지 꽃꽂이를 하는 것이 교화나 신심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불단장엄', 말이야 참 거룩하지만 그걸 꼭 목 꺾은 절화로 해야 할 연유가 있나 싶다. 사은 중에서도 첫째가 천지은이다.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교도들을 압도하는 향기 진한 화려한 꽃들도 꺾이기 전에는 다 천지 속에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었다.

꽃 공양 문화는 불교에서 왔지만, 꺾은 꽃을 꽂는 것은 일본불교가 뿌리다. 꽃꽂이 문화 자체가 발달한 일본이 불교에 이를 차용한 것은 그 나라 경우인데, 이것을 우리가 되려 열심히 지켜가는 꼴이다. 심지어 우리 스승님들이 반대했던 것이 바로 절화 꽃꽂이다. 지난 4월 서울교구 특별법회에서 이정무 원로교무는 "정산종사는 살아있는 꽃을 꺾는 대신 조화를 쓰게 하며 생명존중 실천을 직접 보여 주셨다"며 절화 일색인 풍조를 우려한 바 있다. 심지어 한국불교마저도 이미 초, 종이꽃 등으로 대체하는데, 우리는 우리 것도 아닌 절화 꽃꽂이 때문에 며칠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높은 세상이다. 몇몇 교당이 경축일에 천지은을 담은 화분을 선물한다는데, 그보다 먼저 불단의 목 꺾인 꽃들의 고통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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