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人死路傍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은
皆是流離子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다
一爲烏鳶食 한 사람은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혀서
過者不忍視 지나던 사람들 차마 볼 수가 없네
一爲肌民斫 또 한 사람은 굶주린 백성들이 살을 베어가서
白骨無餘肉 백골만 앙상하여 살 한 점 없도다
一爲凶賊頭 나머지 하나는 흉악한 도적의 머리로다
函去賭黃甲 상자에 넣어 보내면 현상금 많겠구나
一死等是寃 한번 죽으면 원통함은 같아도
淺深猶有異 얕고 깊음은 마땅히 차이가 있도다
人鳥尙可活 오히려 사람과 새를 살릴 수 있었지만
何如作凶醜 어찌하여 그대는 흉악한 도적이 되었느뇨

'길가의 원귀(路傍寃)'-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 호는 아계(鵝溪), 선조 때 8문장가이며 서화에 능한 동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아계집'이 전한다.

위 시는 임진왜란 때 죽은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하고 감상을 적은 작품이다. 6.25와 함께 민족의 최대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은 국토의 70%가 파괴된 전쟁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 벼슬아치들의 권력쟁투의 과정을 '브리태니커'가 요약한 이산해를 통해서 엿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즉, 1578년 대사간이 된 이산해는 서인인 윤두수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1588년 우의정에 올라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원래 친구였던 정철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고 서인의 영수들을 파직, 귀양 보내면서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산해는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이 침입토록 하였다'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어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1595년 대제학으로 복직, 북인이 갈라지자 이이첨, 정인홍, 홍여순과 함께 대북파의 영수가 되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다음해 파직되었다가 부원군이 되어 선조가 죽자 국정(國政)을 맡았다.

붕당정치를 한 선조와 권력 편집증의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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