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수행법은 동정일여의 무시선법(無時禪法)이다. 선은 곧 '원래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하는 공부'라 했다. 수행은 결국 자유인이 되기 위한 공부이다.

내 마음이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마음을 관하고 대조하며 살아보지만 순간순간 망상과 무기공, 혼침으로 보내버린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안팎에서 수시로 부딪혀 오는 수많은 경계의 흔들림 속에 찰나간에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하늘도 덮고 땅도 덮을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라지만 바늘을 찌를만한 곳도 허용되지 않는 것 또한 마음이다. 원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는 조물주의 위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대도 당장 이 한 몸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상황들이 수없이 빚어진다. 진리와 성인은 우리에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보관하며 살았기에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천지는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역동성 있게 음양상승으로 만물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렇게 자유자재로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늘 있어졌다가 없어졌다가 은현자재하며 만물을 변화시켜가는 가운데 무량한 은혜를 상없이 베푼다. 그 무량은 속에 살지만 인과망(因果網)을 펼쳐놓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놓고 살면 거기에 걸려들어 결국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육근으로 동작하는 바가 다 허공에 찍히고 있기 때문에 이미 삶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쉽다. 왜냐하면 '음양 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어놓은 업은 부처님도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때문에 삼세를 살면서 알고도 짓고 모르고 지으면서 쌓아졌던 업장을 녹히는 공부가 필요하고, 마음의 욕심이나 착심을 여의고 밖으로 끊임없이 선업을 행하여서 안팎으로 청정하여져야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 업력을 벗어나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순간순간 다가오는 시간도 청정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동안에 쌓여 있는 업장도 소멸해가는 공부로 대적공하고 대참회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활보해야 하는 세계는 넓고도 넓다. 이미 불보살들은 우리에게 육도와 사생으로 펼쳐져 있는 세계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은 사람 몸을 받았지만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항상 인간의 몸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때문에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착심과 업을 초월하여 심신의 자유를 얻는 공부로써 삼세의 탄탄대로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우인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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