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 송규 종사

소태산 대종사는 법인기도를 마친 후 원기4년 10월 새 회상 공개를 위한 교법을 완정하기 위해 부안 내변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두 제자를 데리고 9인 단원이 기도 때에 사용한 시계 아홉 개를 가지고 월명암으로 향했다. 당시 언답을 막느라 현금을 다 투자한 터라 비상금 대신 시계를 챙긴 것이다.

대종사, 나머지 단원과 영광의 신자들을 뒤로한 채 월명암에 당도하니, 정산 송규는 환희 용약하는 마음으로 스승을 만났고, 백학명 주지 또한 반가이 영접했다. 백학명의 주선으로 가져온 시계와 이만갑의 희사금으로 실상사 옆 초당을 매입하여 김남천, 송적벽 등 몇 제자와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시작했다.

정산종사는 대종사가 변산에 온 이후로도 석두암이 준공될 때까지 2년동안 월명암에 머물렀다. 백학명 선사에게는 대종사가 외삼촌이라고 말하고 지내고 있었다. 실상초당과 월명암의 거리는 4km 남짓,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심심상련(心心相連)으로 지냈다. 송규는 일주일이나 열흘 간격으로 밤중에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스승을 찾았다. 정산종사,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깊은 밤중에도 걸음을 옮겼다 하면 대종사님 계신 초당에 이르고 발을 들었다 하면 월명암에 갔었다. 그 때 힘이 더 뭉쳐진 것 같다. 문제는 당신의 상좌로 믿고 지극히 아끼시는 학명스님 몰래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밤에 귀한 손님이 찾아와 학명스님이 인사를 시키려는데 내가 실상초당에 가고 없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어젯밤 어디에 갔느냐'고 하문하는 학명스님의 말씀에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어서 '외숙(대종사)께 다녀왔다'고 답한 적이 있다."

오늘날 후진들은 정산종사가 대종사를 만나기 위해 다니던 그 산길을 '정산로(鼎山路)'라 명하고 추모의 순례를 하고 있다.

정산종사, 월명암에서 글을 지으니, '지기훈몽운만리(地氣薰濛雲萬里) 천심통철월중간(天心洞徹月中間)'이라 번역하면, '땅 기운은 구름 만리 훈더이 적시우고, 하늘 맘은 달 중간에 깊숙이 사무치다'이다. 정산종사, 후일에 말하기를 "앞귀는 천지의 덕을 밝힌 것이요, 뒷귀는 천지의 도를 밝힌 것이다."

'구산수기'에는 "정산종사, 시를 지으매 뜻이 광활하고 호대했다. 월명암에서 지은 시를 본 사람이 천지도덕을 밝힌 글인데 포함이 크다고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구산수기'에 이런 글이 있다. "백학명 선사의 상좌인 명안(정산종사)이 견성 도인이라는 풍문이 있는 까닭으로 고부 은씨가(殷氏家)에서 후일의 인연을 맺기 위해 수년간 양미(쌀)를 계속 부송(負送)하였더라." 이 인연으로 은성의(殷聖義) 교무가 은씨로서는 유일하게 전무출신을 하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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