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대천 가까운 데는 좋은 인재가 많이 나니 전무출신을 많이 시켜라'
교화대불공 22

원기36년은 시국이 혼란스러워 '1대 성업봉찬'을 원기38년으로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원기38년 3월에 나는 총부 간사근무를 마쳤다.

간사근무를 하는 동안 아침이면 정산종사의 숙소에서 독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낭랑한 독경소리는 마치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귀를 기울이며 듣는 것 같았다.

정산종사의 법문을 받들 때면 기쁨과 희망이 내 마음에 가득 차올라서 마치 극락이 현전한 것 같았다. 그렇게 총부 간사생활은 천상극락이었다.

원기38년 6월2일 동산선원이 개원했다. 1기생으로 3년을 수학했다. 그리고 원기41년 중앙선원을 1년 수학 후 졸업했다. 당시는 학생들 대부분이 반공비생으로 공부했다.

'기한(飢寒)이 발도심(發道心)'이라는 옛말이 있다. 동산선원에서 고산 이운권 교무를 모시고 6명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시설이나 의식주 등 모든 것이 궁핍하고 어려웠다. 하지만 공부하는 재미와 서원일념으로 수학했다.

원기42년 4월 첫 부임지를 좌포교당으로 발령받았다. 이듬해 교당이 쓰러지려고 해서 장대로 받쳐놓고 지낼 때였다. 마침 당시 교도부회장이 형편상 집을 팔아야 한다기에 그 집을 매입해 교당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당 요인회를 개최했다. 모두들 형편이 어려운 터라 가부간의 의견들이 없었다. 나는 제안했다. "교당 터도 학교 땅이니 교당 유지답 600평에 농사를 지어서 그 집을 삽시다."

이 의견은 요인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후 일반교도와 청년들이 함께 합력하여 교당농사를 잘 지어 마침내 대지 800평의 목조초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을 수리해서 봉불식을 하였다.

또 얼마후에는 교당길이 좁아 옆집 대지 200평을 매입하여 길을 넓혔다. 유지답도 400평을 더 샀다. 원기45년 7월29일 대산종사 모친이 열반하실 때의 일이다. 모친이 '천지보은의 조목'을 외우며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고 대산종사는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

원기46년 농한기에 형타원 오종태 종사를 모시고 3일간 교리강습회를 열었다. 100여 명의 교도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후 해마다 농한기에는 열린 강습회는 대성황이었다.

원기51년 좌포초등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기존의 야학을 '원광야간중학'으로 운영해 인근 마을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줬다. 정산종사께서 "명산대천 가까운 데는 좋은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이니 전무출신을 많이 시켜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처럼 좌포 지역에서 좋은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좌포교당에서 15년을 근무하고 곡성교당으로 이동했다.

원기56년 곡성교당 3대 교무로 부임해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교화했다. 요인들이 힘을 합해줘 전세교당이었던 교당을 매입하여 안정된 교화터전을 마련했던 일이 큰 보람으로 남는다.

원기60년 역사 깊은 운봉교당에 부임했다. 운봉은 구름이 항상 산허리에 걸려 머물러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일반·청년·학생교화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또 김현균 부교무도 교화 의지가 많아 요가강습도 열었다. 청년교도인 이화여대생이 무용도 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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