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교법의 창조성, 일원상에 답이 있다"

6월 추모의 달을 맞아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한 제자와의 만남을 기획했다. 친견 당시의 심경과 에피소드를 듣고 그 후로 스승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왔는지 선·후진의 만남을 통해 들어보았다. 1주 예타원 전이창 종사와 김도준 예비교무, 2주 연타원 성보영 정토와 이성진 새내기 정토, 3주 로산 전성완 종사와 조상원 예비교무, 4주 융산 송천은 종사와 정현인 교무가 함께했다. (편집자 주)

▲ 융산 송천은 종사가 원불교학 발전에 힘써왔던 지난날을 웃음으로 회고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교정을 오랜만에 거닌다는 융산 송천은(81·融山 宋天恩) 종사. 대담 내내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42년간 헌신했던 교학대학에서 오랜 제자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와 소태산 대종사의 일화와 그 정신세계를 풀어냈다. 융산 종사는 "대종사의 위대한 창조성을 끊임없이 계승해 내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말문을 열었다.

- 일제강점의 교단수난기에 대종사께서는 대중들을 어떻게 지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출생한 연도가 원기20년(1935)인데, 대종사께서 만년기에 접어든 해로 당시 총부는 초기개척기라 할 수 있다. 험난한 시국이었고 불법연구회의 일동일정이 일경들의 감시하에 이뤄졌다. 대각전 앞 오른 편에는 경찰이 임석하는 자리가 배정돼 있을 정도였다. 양하운 대사모께서도 법회 시 여성교역자가  출석을 부르면 '하이'라 대답하시어 대중들이 크게 웃기도 했다.

대종사께서는 늘 검정법복을 입으시고 경내를 활보하셨는데 위엄이 대단하셨다. 예회는 물론이고 과수원을 가실 때도 공동출역에 임하실 때도 한결같이 그 옷을 입으셨다. 훗날 생각해 보니 대중들을 통솔하고, 공부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게 됐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대중들이 한시라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사불란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셨다.

- 대종사의 위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또한 그동안 공개하지 않은 일화가 있다면.
대종사의 위의를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다. 내겐 늘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셨다. 세정을 알아주실 때는 어찌나 따뜻하신지 춘풍화기셨다.

대종사의 위의를 절감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열반 6개월 전 숭산 박광전 종사 결혼식 때의 일이다. 대종사께서는 청가사를 입고 대각전 법좌에 올라 묵연히 대중을 바라보고만 계셨다. 그런데도 그 위엄이 천지를 진동했다. 기운이 어찌나 승하신지 감시하는 일경들까지도 제압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성자적 기상을 극절히 느꼈다. 대종사께서는 능소능대, 은현자재 하신 걸림 없는 어른이셨고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한 번은 저녁 무렵, 공회당 서선방에서 정산종사께서 '목우십도송'을 해석하시고, 대종사께서 보설을 하고 계셨다. 나도 참석은 했지만 어려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지루했다. 그래서 중간에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대종사께서 법문을 멈추시고, "저 놈 봐라. 법문을 듣는데 재미 없으니까 가지 않느냐. 그대들도 재미를 못 붙이면 크고 좋은 법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일상의 소소한 일에도 늘 진리에 맞게 인거하시니 법문이 참으로 실감 났다.

한때는 열쇠 통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어머니(청타원 박길선 종사)가 그만하라고 뺏으니까 나는 여지없이 울었다. 그치지 않고 울어대는 소리를 마침 대종사께서 지나가시다 들으셨다. "그 놈 데려와라"하시더니 나를 당신 팔에 턱하니 걸쳐놓고 사정없이 엉덩이를 때리셨다.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던 나였다. '여기서 더 울다가는 나만 손해 보겠다' 싶어 울음을 멈췄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마음 먹었다.

총부 어린이들이 대보름날 논 언덕 마른 잔디에 쥐불놀이에 열중하다가 저녁에 동선방에서 한 사람 당 포풀러 매 3대씩 부서지게 맞았다. 열반하시기 2개월 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대종사께서는 열반을 예견하시고, 당신의 인상을 강렬히 각인시키기 위한 애정과 부촉의 작별선언으로 이해된다. 대종사께 어린이로서 매를 맞는 일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영생에 이어지는 극진한 사랑에 평생 감사드리고 있다.

- 원불교 1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 교화와 교학의 지평을 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이어져야 할까요.
여기에서는 교단전반의 문제라기보다는 보완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말하고 싶다. 원기47년(1962) 편찬된 현재의 〈교전〉의 부분적인 수정 보완작업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의 역사도 하나의 참고가 되겠지만, 기독교 성경도 200년~400년까지 오랜 보완작업이 있었다. 불교도 형태는 다르지만 긴 역사를 통해 엄청난 결집이 있었고, 대승불교를 포함한 창작경전의 과정은 역사적으로 다 증명된 사실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단순히 불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만 주창하고 가신 분이 아니다. 모든 종교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열망하신 열린 부처님이시다. 또한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개념을 폭 넓게 이해하면서 우리들은 이를 바탕해 훌륭한 창조적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대종사 당대의 형식과 상황에만 국집해 좁은 시각으로 대종사를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 말씀하신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의 창조성을 무엇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우리는 교리도에서 신앙과 수행의 궁극근원을 '일원상의 진리'로 모시고 있다. 거기에서 많은 힌트와 배움을 발견하는 일이 보편화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일원상 진리는 그 상징만으로도 지성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일으키고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일원의 진리를 광범위하게 잘 응용하고 대중화하면 바로 그것이 원불교의 대표적 창조성이 될 것이다. 일원의 진리는 우리의 교리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진리의 총부'라고도 볼 수 있다. 사은의 은혜도, 삼학의 수행도, 일상수행의 요법도, 모든 교리가 일원상 진리의 '종합체'이다. 이렇듯 일원상과 연관해서 깊게 연구하고, 실천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창조성을 강화시키는 큰 길의 하나이다. 공타원 조전권 종사는 '교리도'와 관련해 "대종사님께서는 교리도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라고 질문하니, "나는 법률은에 속한다"고 답하셨다.

- 성리공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컨대 도가 넘게 화가 났다고 하자. 그런데 그 도를 넘는 화라는 것이 뭐냐? 근본으로 알고 보면 바로 성품이다. 즉 잘못 써진 성품일 뿐이다. 그래서 참 성품을 확실하게 깨치면 좋은 일이 벌어진다. 일원 즉 불성이며, 불성 즉 성품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성품을 분별과 차별화해서 깨치는 길이다.

또 다른 깨침은 통째로 보는 깨침이다. 두가지가 다 병행돼야 하는데 넓게 볼 때는 일원불, 불성불, 자성불, 성품불과 함께 현상 자체도 통째로 부처로 보기도 한다.

대종사께서는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보자고 하셨다. 그런 관점에서의 성리도 있다. 이는 참회에 있어서 사참과 이참의 두 길을 병행하는 것과도 같다. 후자는 현상과 본체를 둘로 보지만 크게는 둘 아닌 하나로 보자는 것이다. 즉 본원과 현상이 처처불상인 줄 알고, 처처불상의 삶을 살자는 것이니, 이것은 전체불의 소식이다. 나도 이 이치를 선용하느라 바쁘다. 바뻐.

▲ 융산 송천은 종사와 정현인 교무가 원광대학교 솔밭길을 거닐며 사제지간의 정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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