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입교, 세상 다 얻은 듯 기뻤습니다"

부안 백산면 임방마을은 백산교당에서 5분여 걸어가면 되는 곳이다. 면내에 몇몇 교도 그룹이 있다. 그중 김양진(83·恩陀圓 金兩進) 교도 댁에는 요즘 목사부부가 자주 방문한다. 김 교도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동네 가정방문을 자처한다.

"한두 달 전에 우리 마을에 개척교회가 들어왔어요. 목사 부부가 세 번씩이나 뭘 들고 우리 집에 오는데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했죠. 왜냐하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원하지 않는 목사 부부의 불공을 받을 때면 그는 평생 공부한 법문을 동원해 '진리는 하나'라는 교법을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목사 부부가 어르신에게 하는 말이 있다. "참 아깝네요. 똑똑한 할머니가 신앙을 잘못 가져서…." 혀를 끌끌 차는 목사 부부에게 그는 한마디를 강조했다.

"나는 일원상 부처님 믿고 극락 갈랑게, 목사님은 하나님 믿고 천당가시요. 요즘은 종교 따지지 않고 이웃종교를 존중하는 시대인데 목사님은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세요. 이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왜 자꾸 하나님 믿으라고 그런다요. 근건 실례지요. 그리고 걱정돼서 그러는디 교회를 개척하려면 교인 한두 명이라도 데리고 와서 해야지 어쩔라고 그라요."

흔들림 없이 할 말을 다 한 그는 다시 또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조용기 목사나 세월호 사건을 낸, 거~ 유병언 씨도 다 기독교 맞죠. 그런데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런다요. 하나님 법이 그러지는 않지요."
이에 목사는 "그건 이단이어서 그러죠"라며 한참을 설교했다.

요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미지게 털어놓는 그는 이제는 힘이 없어 어디 다니는 것도 맘대로 할 수 없다. 그의 손은 퇴행성관절염으로 홍조를 띄며 부어있는 듯했다.

"얼마나 업이 많으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요. 내가 일흔 살도 안 돼서 죽을 줄 알고 각막기증서약을 했는데, 이렇게 오래 살아버렸어요. 그리고 눈은 기증도 못하게 백내장이 됐어요." 죽어서라도 복을 지어 내생에 전무출신을 해야 한다는 그. 출가서원을 다지기 위해 매년 육일대재와 명절대재에서는 '전무출신전 고축문'을 정성을 다해 올린다.

"진즉에 출가 서원을 세웠어요. 우리 법을 전하고 싶어서 서원을 챙기고 또 챙깁니다. 올해 육일대재는 못할랑가 했어요. 건강이 워낙 왔다 갔다 해서요. 지난 겨울에는 중환자실에서 두어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당게요. 우리 교무님의 지극 정성으로 다시 살아난 것 같아요. 그래서 있는 정성 다해 돋보기도 안 끼고 고축문을 읽었어요. 마지막이 될까 싶어서." 요즘도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그는 원음방송을 들으며 마음을 챙긴다.

그가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신앙이 확립되기까지는 이미 고인이 된 남편 조연수 교도의 신앙심 실험도 한몫을 했다. "저는 대한민국 사람이 다 원불교 믿어도 우리 영감은 안 믿을 줄 알았어요. 젊었을 때 벽에 걸린 일원상 액자를 2번이나 내동댕이쳐서 지금 걸려 있는 저 일원상이 3번째 일원상이랑게요. 영감이 술을 안 마시면 좋은데, 술만 먹으면 좀 그랬어요." 남편의 이러한 숱한 경계를 이겨낸 비결은 딱 한 가지. "난 죽고 없는 사람이다. 영감이 이러든지 저러든지 나는 죽은 사람이다."

그는 남편이 바로 '생불님이다' 생각하고 뜻을 받아줬다. 그리고 유지비 봉투도 만들어서 불전에 올렸다. "살아있는 부처님 잘 모셔야 헌게 적은 금액이라도 같이 헌공했지요." 이렇게 포기하듯 경계를 받아들이고 불공의 자세로 대하니 어느 날 남편이 교당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교당에 입교하고 한 7년 바짝 공부하고 돌아가셨지라우. 정정자 교무님 계실 적에 나랑 둘이 나란히 앉아서 법회 보니 참 좋더구먼요.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당게요. 한번은 영감이 '문자공부는 지식일 뿐이고 마음공부는 지혜이다'고 말허닌께 참 유식하구나 생각했죠. 우리 영감이 나한테 '가방 들고 교당 잘 다니길래 공부 열심히 헌 줄 알았는디 나보다 못 허는 면도 있네' 말하더라고요."

남편이 마음공부의 맛이라도 보고 열반한 것은 "백산교당 역대 교무님들의 정성이 함께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우리 영감은 교당 신축할 때 그렇게 좋아하며 이것저것 발 벗고 도왔어요. 봉불식할 때는 동네 농악단에서 꽹과리 치는 상쇠도 했죠. 그런데 봉불식 후 어찌된 영문인지 병원에 가게 됐고, 회복이 되지 않아 새 교당건물에서 제일 먼저 제도를 받았습니다." 열반 후에도 유지 헌공을 했다.

요즘 그는 조석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늙어서 몸에 힘이 없으니 기도하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어요. 기도하면서 이대로 가는 날까지 온전한 정신만 갖게 해 달라고 심고합니다. 또 다음 생에는 전무출신 서원을 꼭 이룰 수 있게 인연을 잘 만나도록 그동안의 업장 소멸을 위해 기도합니다. 마지막 소원은 자식들 얼굴 한 번씩 보고 가는 것이지요."

협심증, 갑상선저하증 등으로 부정맥이 한 번씩 찾아올 때가 가장 힘들다는 그의 곁에서 동네 어르신 몇 분이 동양화를 즐기고 있었다.

"고맙지요. 나 어쩐가 싶어 찾아와 주고 이야기 상대해 주니 참으로 고맙지요. 김지형 교무님은 일요일 아침마다 저를 데리러 옵니다. 그 바쁜 시간에~." 은은한 자비가 풍겨오는 그의 심성에서 '이제 급할 것이 없다'는 평온함이 느껴진다. 세상을 대종사님의 법대로 믿고 행하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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