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3

운봉교당은 이웃교당과 단합해 공부발표를 하는 등 공부하는 교당 분위기를 이끌었다. 또한 신정예법으로 교도들의 애경사를 챙겼다. 교도들도 감동해 교화는 나날이 번창했다. 교당의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고자 전임이 조직한 계를 유지하여 교당유지 답을 매입하고 후임에게 교당신축기금을 인계하고 장항교당으로 이동했다.

원기63년 4월 장항교당에 부임해 보니 영세교당이었다. 그러나 군산교당이 연원되어 지원을 아끼지 않아 어려움 없이 교화에 임했다.

원기68년 1월 수계교당에 부임했다. 수계교당은 원기36년 정산종사님께서 머무르시며 예전을 편찬하신 곳이다. 가족적인 마을법회와 부부법회를 중심으로 교화단 운영이 잘되는 교당이었다. 교리강습과 훈련을 통해 청소년교화를 해 나갔다. 수계교당은 목조건물로 신축한지 40년 쯤 되니 빗물이 새는 등 전기누전으로 화재위험이 컸다. 대대적인 수리를 하기도 했다.

원기74년 1월 구례교당에 부임해 4년 근무하는 동안 도지원사업으로 어린이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원기78년 퇴임을 하고 중앙여자원로수도원에서 정전사경과 붓글씨, 압화 등 취미 활동과 간절한 기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전날의 모든 잘못을 지극히 참회하며, 일체생령이 다 제도의 문에 들기를, 일원상의 진리를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후세에 길이 이 법통이 전해지기를,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사업에 합력하여 세계를 일원화 선법화 하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대종사님과 이 법의 큰 은혜에 날마다 감사 올리며 살고 있다.

신앙 수행 체험담에 대해 동산선원에서 고산 이운권 원장님을 모시고 공부할 당시 감각감상이 떠오른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의두요목을 연마했으나 의심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산님을 모시고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의심이 생겼다.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일체 상이 곧 이 상이 아니며, 또 말한 일체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니라." "여래가 말한 불토장엄이란 것은 곧 장엄이 아닐새 이것을 장엄이라 하나이다." "여래의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닐새 이것을 마음이라 이름하나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하며 의심이 걸려 자나 깨나 저절로 궁굴려졌다. 어느날 문득 '부처님의 안목과 중생의 안목이 서로 다른 것이며, 일체 법은 둘이 아니니, 언제 어디서나 서로 막힘이 없는 것이요 차별이 없는 것이며 물듦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49년 설법이 어떠니, 중생을 제도하니, 불토를 장엄하니 하며 논할 것이 무엇 있으랴'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에 홀연히 적연부동(寂然不動)해지고 통쾌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적연부동심이 곧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일체심의 중심이요, 무념삼매(無念三昧)의 몸체요, 공적영지가 눈앞에 나타난 자리다.

누가 만약 수도일미를 일러보라 한다면 바로 이 적연부동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올바른 답이요, 이것 외에는 어떠한 언행으로도 답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수도인은 이러한 수도일미를 알아야 참 수도인이 되는 것이며, 그 수도일미를 구하기 위하여 꾸준히 공들여야 그 삶이 허망하지 않게 되고, 그 일미를 실생활 속에서 밥 먹듯이 맛보면서 살아가야 비로소 모든 착심을 능히 놓을 수 있고 생사윤회를 겁낼 것도 없는 것이라 확신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