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원불교' 하면 제일 먼저 '동그란 일원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건물 외벽에도, 법당의 한 중앙에도, 원불교 관련 곳곳에는 이 '동그란 일원상'이 모셔져 있는데요. 원불교에서 '일원상'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원불교 교법과 사상의 근간이 되는 '일원의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동그라미 모습으로 형상화시켜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종사께서 깨달은 '일원의 진리'를 이 '동그란 일원상'으로 상징화하여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모시고 이 원상을 볼 때마다 '일원의 진리'를 잊지 말고, 그 진리의 깨닫고, 닮아가며, 위력을 얻을 수 있도록 신앙과 수행을 해나가도록 한다는 것이죠.

이 '동그란 일원상'이 원불교의 신앙 수행의 대상이자 표본임이 공식적으로 제시된 것은 원불교 초기교서 중의 하나인 〈조선불교혁신론〉에 '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 숭배로 혁신하고자 함'으로 천명됨과 아울러 익산 총부 대각전 정면 불단에 최초로 봉안된 원기20년의 일입니다. 대종사께서 깨달음을 얻고 초기교단이 시작된 지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후죠.

하지만, 이 일원상에 대한 구상과 언급은 그 이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대각 직후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하신 대각일성에서는 '한 두렷한 기틀'로, 원기4년 김제 금산사에서는 최초의 그림 일원상으로, 원기14년 제자들과 남중리 산책 중에는 일원상을 땅에 그리시며 우주의 본가임을 언급하곤 하셨죠.

이렇게 수년을 거쳐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으로 제시된 원불교의 '동그란 일원상'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을까요?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중략)…,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것 그 자체이며,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이 깨닫고 체득하여 사용하는 그 마음자리이며,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의 본래 성품을 의미하죠.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과 그렇게 존재하도록 작용하는 이치, 깨치신 성현의 모든 마음과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 모두의 본래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하나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분별이 끊어져 생멸 거래나 선악업보, 언어나 이름 형상이 모두 텅 비어 버렸고, 경험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면면을 보면 선악업보에 분명한 차별과, 언어와 이름이나 형상이 뚜렷해서 손 안의 구슬처럼 아주 확연히 차별적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차별적 현상 또한 그 근원을 들여다보면 늘 같은 총량 속에서 숨었다 드러나는 차이일 뿐 서로 별개는 아니죠.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마음을 보고,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와 상황들을 한 번 보세요. 그간의 우리 눈이 너무 보이는 것에만, 현실의 이해에만 급급했던 건 아닐까요? 곳곳에 모셔진 원불교 일원상은 늘 일깨웁니다. 진실을 보라고, 실체를 보라고 말이죠. 이런 시각으로 원불교의 '동그란 일원상'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무엇이 보이나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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