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산 송도성 종사

형인 정산 송규 종사와 일곱 살 터울인 아우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종사, 그의 입문과 출가는 원불교 교단사에 또 하나의 큰 경사였다. 13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형이 있는 영광으로 온 아우 도성. 차멀미가 심해서 이사 오는 과정에 고생이 많았었다.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 신촌마을에 살면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를 따라 30리길을 걸어서 백수 길룡리 영광지부로 예회를 다녔던 송도성이다.

부친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뵈온 도열(道悅, 호적명)이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자, 대종사가 "네가 어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어린 도열이 "부심자(夫心者)는 지광지대물(至廣至大物)이니 수련정신(修練精神)하여 확충기지대지심이이(擴充其至大之心而耳)입니다"고 답했다. 이에 대종사, 크게 기뻐하며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며 법명을 내렸다.

그후 반년이 지나서 도성은 길룡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성이와 길선(吉善)이를 우리 한번 바꿔서 가르쳐 봅시다"하고 대종사와 송벽조가 뜻을 같이 했다. 이리하여 대종사의 장녀 청타원(淸陀圓) 박길선은 남부(학정리 신촌마을을 말함)에 와 살게 되었고, 도성은 길룡리에서 살게 되었다.

주산종사의 출가는 원기 7년(1922) 16살 때였다. 부안 변산에서 교법을 초안하며 은거하고 있던 대종사를 찾아 유명한 출가시(出家詩)를 바치고 성불제중의 길에 나선 것이다. '헌심영부(獻心靈父) 허신사계(許身斯界) 상수법륜(常隨法輪) 영전불휴(永轉不休)'(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써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란 대서원을 담은 출가시였다.

대종사, 크게 기뻐하며 도성을 형인 규와 더불어 아끼고 사랑했다. 석두암에서 여섯 동지와 더불어 대종사를 모시고,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석하여 청법낙도했다. 법설 내용은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하는 방법을 설하였는데, 어린 도성은 이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주산이 이 때 기록한 법설이 〈대종경〉성리품의 근간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주산 송도성 종사가 얼마나 상근기이고, 문필이 뛰어난 천재소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4학년 당시 필자가 중앙교우회(원광대 원불교학과와 영산·동산선원에서 수학 중인 예비교역자들의 연합모임) 회지인 〈한길〉지의 편집을 위해 취재차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를 찾은 적이 있었다. 휘경학원 재단이사장실에서 만난 팔타원 대호법이 이런 말씀을 했다. "정산종사님은 가족으로 축구팀을 짜가지고 오셨다. 나는 개인기는 뛰어난 선수지만 팀을 꾸리지 못해 정산종사님이 부럽다." 그렇다. 정산종사는 무엇보다도 자랑스런 아우를 두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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