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2세기,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원기18년(1933) 영산선원 계유동선에 참여한 선원생과 회원들이 주산 송도성 종사와 함께.

내년부터 원기2세기의 새로운 100년이 시작된다. 대종사의 불법연구회 시대가 우리의 신앙과 수행의 원형질 시대라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태산의 숨결이 스민 그 시대는 오늘과 맞 닿아 더욱 생명력을 가지든지 아니면 점차 신화가 되어갈 것이다.

원기2세기는, 지난 100년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상상할 수 있겠다.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부재를 대신할 정신적 역량을 갖추고 간악한 일제 말기부터 해방 공간의 혼란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교단을 수호했다. 무엇보다 소태산 대종사가 주세성자임을 천명하여 이후 모든 교도가 미래의 새 주세불 회상에 참여한다는 엄청난 공동 유대를 확립시켜 줬다. 교명을 소태산의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표방한 것도 대각여래기에 시대를 따라 제도의 만능을 편 것으로 교단 미래에 큰 상징적 의미가 된다.

대종사는 불교의 용어인 '대각'을 하셨으나 유·불·선을 통섭 하셨다. 정산종사는 일찍이 유가의 수심공부로 득력을 하고 대종사 문하에서 원성(圓成)하였으며 유가적인 풍모로 〈세전〉, 〈예전〉 등의 교서를 편찬하여 인간의 삶이 '법도'있는 수도인이 되도록 제도화하여 대종사를 보좌하신 면모를 보여줬다. 대종사보다 9세 연하, 종법사 재위19년(1943~1962).

대산종사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한 시대를 통하여 정치력과 감화력으로 교단을 이끌었고 사회에 대응했다. 물질이 풍요해지는 시기에 맞춰 교단의 외연을 크게 넓히고 한국사회에서 '40~50년 결실'을 거두었으며, 해외 교화를 시작하여 세계 6대주에 교당을 설립하여 '400~500년 결복'을 준비했다. 특히 법위사정을 양성화하여 출재가의 법강항마위, 출가위, 대각여래위를 많이 배출하였고, '천여래 만보살'의 예언적 의미를 실행에 옮겼다.

대산종사는 풍모가 조선의 19세기에 일어난 새 종교들의 형태인 도교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였고, 특히 전쟁 후 요양 중 기도를 통해 득력을 하였다고 한만큼 교단에 기도를 성행케 하여 '기도와 불공의 신앙체계'를 확립하신 면모를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종법사 재위33년(1962~1995).

대산종사 이후 현재까지의 교단은 대산종사의 진 면목을 확산 시키는 연장으로 볼 수 있으며 재가 출가가 모두 국가 사회에 적극 참여하고 명실상부한 한국사회의 중추 종교로서의 자리매김을 하였다. 따라서 교단은 외형적 발전 또한 크게 이루어 가고 있다. 이제 정산·대산 두 분 성자들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 하였다. 그러나 100년의 역사중 대종사 시대 28년, 정산종사 19년, 대산종사 33년+20년의 흐름을 읽으며 우리의 신앙과 수행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전〉에는 교의편과 수행편은 있다. 그러나 신앙편은 없다. 이는 교의의 수행을 통하면 진공묘유의 이치를 알아 '없어서는 내가 살 수 없는' 사은의 본래 자리를 또한 깨우치게 되니 자력과 타력의 근원을 알아 진실한 보은 불공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행이 대각을 완성하는 행위라면 신앙은 세상을 낙원화하는 과정이겠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교단에서는 백일, 천일, 심지어 만일기도 등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는데 세계, 국가, 교단, 가정의 안락과 개인의 성공을 구하기 위해 법신불 사은전에 빌었다. 타력을 통해 세상을 낙원화 하자는 과정이지만 위력은 알 수 없었다. 이는 조선 후기 도탄에 빠진 민초들이 좋은 세상을 갈구하며 빌었으나 결과가 없는 도교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소태산께서 법계인증을 받기위해 천지신명에게 올린 혈인기도가 타력을 구하는 효시라고 본다. 오늘날은 타력을 구하는 기도가 일상화되니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법계를 움직이려는 자력의 힘도 목적도 부족하고 기도비만 받으면 혹세무민이라고 비난해도 감수해야 할 처지다.

근래 50년 동안 우리의 신앙과 수행은 과거 소태산의 시대와 비교해 볼 때 타력신앙 쪽으로 한참 치우친 불균형의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위를 바라보는 타력 신앙이 위주가 되니 도가의 생명인 자력 신을 바탕한 삼학 병진 수행선풍은 없어지고 삼대력 수행을 해야 올라가는 법위마저 세월이 흐르면 학년 오르듯 올라가니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과거에는 물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수행자가 진리를 추구하는 서원심이 없어지면 재색명리를 추구하기 쉽고 또한 수행자가 일심과 정의실천의 올곧은 무시선의 공부심을 놓게되면 자신도 모르게 부패에 휩싸일 수 있고 이러한 모습들은 여러 종교가에서도 자주 볼 수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세상에서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경험적 논리가 있다. 절대권력은 견제가 없기에 세상이 자기 것인냥 착각하고 온갖 짓을 마음대로 한다. 그 말로는 모두 비참하게 종결 되었다.

도가에서는 민주의 정신과 제도가 아직 없기에 견제받지 않는 자리에서는 더욱 대중과 함께 소통해야 대중이 감화를 받는다. 법을 구하는 수행자들의 마음을 깨우쳐 주어야 숭앙을 다하는 것이다. 대각여래는 대중의 마음을 읽고 무량방편으로 제도를 하시기에 대중은 참 제도를 받으며 낙원세계로 가는 것이다.

대산종사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50년이 넘는 동안 교단의 법풍은, '기도와 불공' 이라 할 수 있었으니 삼대력 수행은 미약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여래를 추구하기보다 추동적인 인간으로 낙원세계를 향하도록 신앙으로 길들여진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사병행을 통한 무시선과 삼학병진으로 생불이 되도록 말씀 하신 대종사의 〈정전〉과는 다른 대산종사의 독특한 가풍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또한 대산종사의 시대적인 방편으로 원불교 만대의 신앙을 확립하려 했다면 우리시대는 신앙을 배웠으며 이제는 근본되는 수행을 겸할 때이다.

앞으로 원기2세기에도 원불교가 여전히 신앙을 중심하면, 위만 쳐다보는 습관에 평등성 중 무피차한 그자리를 알지못해 옛날 불가의 조사위 쟁탈하듯 수행없는 중생들이 법통을 욕심내어 서로 투쟁하여 교단을 이전투구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원불교는 자성의 혜광이 꺼진 진리의 암흑시대로, 권력지향의 단체로 전락되어 주세성자 교단의 교운도 사은의 위력도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원기2세기에도 출가는, 재가를 타력신앙으로 이끄는 위치에서 소위 갑을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대종사의 재가 출가 평등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시대적 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귀족 출가와 순종(順從) 재가로의 관계가 구체화되면 새 시대 원불교의 역동성은 100년 만에 위기를 맞아 좌초하게 될 것이다.

소태산이 확립한 불법연구회의 제도는 그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교단 미래의 방향이고 재가 출가가 함께하는 상징이다. 소태산의 교법은 〈조선불교혁신론〉에서 밝히신 재가 출가가 같이 공부하는 대승의 법이다. 새로 열리는 원기 2세기에도 은산 철벽같은 출가중심의 틀을 고수한다면 열린 정신의 모든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소태산의 가르침을 추구하여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이 교단의 발전인지 아닌지 어느 길이 진정 대각여래위에 오르는 길인지는 후대가 평가 할 것이다.

원기2세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명해 졌다. 새로운 제2세기는 소태산의 법으로 단련된 원광불들이 활동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서 시대와 함께하고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는 소태산의 생불들의 시대이고 터전이어야 한다. 그 단련은 "삼대력 수행으로 불지에 오르고 사은 보은으로 낙원세상 이루자"는 우리의 서원 실천이다. 이는 천만년이 흘러도 변할수 없다. 우리에게는 천만 다행 그렇게 수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지 않는가? 삼학공부를 진실로 알면 수행하게 되고 수행하면 증득이 있게 된다. 자비 법풍이 불고 수행 선풍이 장엄하며 사자후로 성리를 설하고 스승은 법 방망이로 한 순간에 깨우침을 주신 위대한 대종사 시대처럼 11과목 훈련으로 원광생불의 시대를 열어가자.

앞으로 원기2세기는 더욱 개벽되는 밝은 시대라 본다. 수행자들은 자타력을 겸비한 삼대력 수행으로 마음을 맑히고 밝혀 법계와 합일하니 정의를 실천하는 힘을 갖게 되고 맑아야 물속이 보이듯 걸림없이 정(正)과 사(邪)를 판단하는 밝은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법력으로 뭉친 재가 출가의 교단은 진리의 대행자로서 억조창생을 제도할 것이고 가정과 세상은 서로 불공하며 사중 보은으로 낙원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지금 그 조짐이 보이지 않는가?

▲ 나도국 원로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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