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얼마나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지구상에 살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자기가 경험한 세계에서만, 그것도 각자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믿고 싶은 세상에 한정되어 살아가죠.

그러다 보니 그 경험과 앎에 얼마나 한계가 많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며 어떤 신념을 형성해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새롭게 흡수하는 정보 또한 그저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대중적인 논리나 검증되지 않은 신념 체계들인 경우가 허다하죠.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편협된 시각과 한정된 안목으로 수많은 실수와 오류를 남발하면서 스스로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며 살기가 쉽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채 말이죠.

그래서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역대 모든 성자들이 자비방편으로 '진리'를 역설하고 그 진리적 안목으로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종교의 문을 열어 인도하셨던 거죠.

그 중에서도 원불교는 '일원의 진리'를 믿고 그 진리적 안목으로 참 행복을 열어가도록 합니다. 우리의 어리석고 한정적이고 편협된 신념체계가 아니라 '일원의 진리'로 믿음의 체계를 형성하고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을 쓰고,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거죠.

그렇다면 원불교에서 '일원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믿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는 하나이자 부처'임을 믿는 것입니다. 김준영 교무의 머리카락, 손가락, 팔, 다리가 개별적으로 보면 하나씩 나눠져 있지만, 전체로써 한마디로 표현하면 '김준영 교무'라 할 수 있듯이, 합해보면 '일원의 진리'이고 나눠볼 때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모습으로 한없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그 모든 존재 전체를 존중하고 그 위력과 권능을 믿는 것이죠. 세상의 모든 생명있는 것과 생명조차 없는 모든 것들이 위력과 권능으로 은혜를 내려주고 있는 부처임을 알아서 그 특성을 따라 모시고 보호하고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체로써 총량적으로는 생사나 선악업보나 언어 명상이 늘 함량 그대로여서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없는 가운데서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의 이치를 따라 생사나 선악 업보에 따른 죄복과 고락, 언어명상 등의 차별적 현상이 생겨남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우연이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기거나 속일 수 없는 인과의 진리에 따른 것임을 믿는 것이죠. 이러한 믿음은 모든 고락을 스스로 책임지고 감수하며, 감사하고 보은하는 태도를 형성하게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자신 또한 그 본성은 모든 부처님이나 성인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불성을 지닌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믿을 때와 위력과 권능의 부처라고 믿을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에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죠.

원불교 일원의 진리를 믿는다는 건 이런 믿음으로, 이런 신념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세요? 스스로의 한정적인 경험이나 편파적인 정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현의 깨달은 안목에서 제시한 진리를 믿고 산다는 것, 진리를 접하고 배우며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축복이자 은혜가 아닐까요?

<벤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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