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경희 교무
과산 김현 교무님을 모시고 원기77년부터 영산성지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이야기다. 부임 당시 40대였던 과산님은 13년 동안 영산성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대각터 법인광장 등 주요 성적지 토지 확보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과산님은 염념불망 성지장엄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큰 화두였다. 되도록 자연과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며, 인위적 장엄을 최소화하고 대종사님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성지를 꿈꿨다. 때문에 길룡리 주민이 모두 떠나고 출가자들만이 지키는 성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지수호는 선진님들의 후손들이 마을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지켜나가길 원했다.

그래서 늘 주민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취사했다.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여러 시도를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주민의 편리를 위해 만든 '영산상조조합'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가난한 소농민들이 농협에 필요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는 담보나 보증인이 필요했고, 보증인을 구하기 위해 혹은 감사의 답례로 혹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문제 등 여러 갈등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조조합은 길룡리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늘 집을 비우고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주민들에게 상조조합 금고는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는 곳이었다. 때로는 귀중품을 맡기기도 했다. 농협을 이용하려면 시간 맞추어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므로 하루가 소모되었지만 상조조합은 밤이든 새벽이든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일정액의 신용대출이 가능했으므로 긴급히 필요한 자금은 언제든 빌려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출자금통장을 아예 조합에 맡겨놓고 다닐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이후 국가 금융사태와 교단의 '종로신협' 문제가 터지면서 후임교무가 이를 유지 못하고 정리했다. 예금과 배당출자금을 모두 돌려주고 남은 2천여만 원의 잉여금을 마을공동자금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주민들이 회의를 해 영산교당에서 시작하려는 지역아동센터(민들레세상)시설지원금으로 희사하기로 했다. 또는 고등공민학교로 인가받았으나 여러 사정으로 폐교 결정이 내려졌던 영산성지고등학교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주산종사님 시절 근동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산님은 이 뿌리를 놓지 않기 위해 교단 어른들을 설득하고 스스로 무한책임을 지기로 했다.

당시의 교단은 냉담했다. 학생이 거의 오지 않아서 폐교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필요로 하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묵묵히 그 모든 것을 감당해 나가셨다. 과산님은 학교를 위해 후원금 외에도 외부에서 설법하고 받은 일체 금액을 다 내놓으시고 부족금은 상조조합에서 빌렸다. 데리고 온 자식처럼 늘 사무소 식구들 눈치를 보며 교사와 학생들을 챙겼다.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일 때는 스승님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절벽 끝을 걷는 것처럼 이끄셨던 영산성지고가 후일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모체가 되고 우리 교단 대안교당의 산실로 지칭될 줄은 몰랐다. 영산성지고의 교육 가치가 점점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동안 따르며 고생했던 분들에게 일체의 명예를 다 돌리고 물러나셨다.

이뿐만 아니다. 삼밭재 임로를 개척하고, 이바리 골짜기 임로를 오를 때마다 청소년수련관 이야기를 했다. 자연환경을 잘 활용하여 청소년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말씀이었다. 험한 골짜기에 가능할까 싶었지만, 지금 그곳에 국제마음수련원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핵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거의 없던 시절, 반핵단체 모임에 참여하여 공동대표를 맡았지만 회비는 일체 공금을 쓴 적이 없었다.

과산님이 총부로 떠난 뒤로 후임교무가 그 일을 인수받았다. 후일 핵폐기장이 영광에 들어오려 할 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과산님이 쌓아둔 관련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였다. 영산성지 사랑의 뿌리가 되어준 과산님의 뜻을 어찌 모두 알리오! 다만 직접 혹은 옆에서 받들며 뵈었던 내용을 적어보며 그분의 뜻이 시대와 현장에 맞게 늘 살아나길 기도한다.

<동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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