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정전〉

▲ 김준영 교무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죠.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그 길을 묻습니다. 우리가 원불교를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원불교에 입문했다고 해서 '행복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탑승이라기보다는 이제 겨우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에 도착했을 뿐이라는 걸 말이죠. 명심해야 합니다. '행복'이라는 목적지는 표를 끊고 직접 기차에 올라타서, 중도에 이탈하거나 내리는 일이 없이 실제로 끝까지 함께 가야만 하죠.

행복으로 가는 기차는 많이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의 절이나 교회, 성당이나 교당에서 각종 기차를 준비하고 많은 노력을 하죠. 심지어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제대로 된 진리적 안목만 갖춘다면 누구나 진정한 행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에 입문했다는 사실만으로 방심하여 역에서 헤매느라 정작 기차에는 올라타지도 못하고 시간을 허송하며 불필요한 고통을 장만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행복은 진리를 믿고 그 이치를 따라 구해야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서 복락을 구하고자'하죠. 원불교에 입문을 했든 하지 않았든 과연 나는 일원의 진리를 믿는 사람일까요? 그 진리를 믿는 사람은 무엇이 믿어지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인과가 믿어집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고, 내가 짓지 않은 것을 받을 수 없으며, 지은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거죠. 짓지 않은 요행을 바라거나 지어놓고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진리를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미 지어서 받게 되는 것은 남을 원망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달게 받고 갚지 않으며, 새로운 선업을 쌓고 악업을 그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인과를 믿는 사람이죠.

내가 부처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수면 위의 섬들이 멀리서 보면 제각각인 듯 떨어져 보이지만,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 또한 한 명 한 명이 제각각의 육체를 가진 개별적인 존재인 듯 보여도 실상은 크게 하나로 연하여 둘이 아니라는 거죠. 그 둘이 아닌 하나의 존재를 이름하여 부처라 할 수도 있고, 신이라 할 수도 있으며, 위력과 권능, 은혜와 사랑, 지혜와 복덕이 충만하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비록 중생과 한 몸이라 때때로 어리석고 욕심과 집착에 흔들리며 희로애락의 경계에 일희일비하며 좌충우돌하기도 하지만, 한 마음 문득 돌이키면 지혜와 사랑과 이해가 가득한 부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런 사람은 진리를 믿는 사람이죠. 하지만, 육체에 한정된 자신만을 자기로 알아서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고, 늘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만을 생각하여 욕심과 성냄과 시기 질투의 어리석은 중생심으로 살아간다면 진리를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부처이듯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 또한 부처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나를 둘러싸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과 생명조차 없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부처라 믿어진다는 거죠. 그런 모든 부처에게 공경과 존중과 배려가 있어진다면 진리를 믿는 사람이고, 내 맘대로 이용하고 조종하려 든다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믿어지고 진리로 구해야 진정한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텐데요. 어떻게 해야 진리가 믿어질까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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