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모든 기억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 이세인 교도는 자작시 스크랩북을 펼쳐 보이며 시를 낭송하고 속뜻을 설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용병을 모집했습니다. 나는 의용군을 안 가려고 굴속에 들어가 피해 있기도 했었죠. 당시 송천농업대학 3학년이었어요.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선발이 돼 유학을 갈 예정이었는데…."

산산조각이 난 65년 전의 꿈을 꺼내놓는 유성교당 이세인(87·호적명 국인)교도. 그의 출생지는 평안남도 송천군 통선면 상리 송동 826번지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집 주소. 지금껏 고향을 찾지 못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왔다는 그와 피난살이의 힘겨운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유성교당 민성효 교무는 "일요일 법회 후 제 설교를 듣고 시를 써서 저에게 줍니다. 신심이 나날이 깊어지고 있어요. 세인 교도님이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입니다"고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그가 겪은 1.4후퇴

"전쟁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북에서 1.4후퇴 당시 살아야겠다는 그 한 생각으로 피난길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죠." 깊은 숨을 몰아쉬고 그가 겪은 1.4후퇴의 현장을 말했다.

"밤중이었어요. 눈물도 안 나올 정도였죠. 옷이랑 가재도구를 챙겨 지고 나왔어요. 죽을 고비 넘기며 나왔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임진강을 건너면서도 이쪽인지 저쪽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죠. 또 한강에서는 한강인 줄 몰랐어요. 그만큼 정신이 없었고 어둠기도 했죠. 길을 몰라 다시 북으로 간 사람도 있어요. 강을 따라 걸어서 내려왔어요. 옷은 이미 다 얼어버렸어요." 한마디로 그는 사지에서 살아난 셈이다.

"날이 훤해지니까 군인차가 무조건 우리를 실었어요. 남자고 여자고 간에 마구 실더라구요. 가족은 이미 다 흩어지고….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서 우리를 내려준 곳은 조치원이었습니다. 무조건 내렸지요." 구사일생 살아난 안도감이 자리했다지만 다시 긴장의 연속이었다.

"허허벌판에 내려주면서 '남쪽으로만 가라'고 일러줬어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살기 위해 걸었습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까지 와서 다리를 넘어 한 민가에서 보리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초가집들이 있기에 무조건 들어갔죠. 그랬더니 '피난길에 고생한다'며 총각김치에 밥을 차려주었습니다. 보리밥 좀 먹고 다시 걸었습니다." 훗날 생활이 정리되고 보리밥을 얻어먹은 곳을 찾아보니 익산 옆 김제 부용지역이었다고.

전라도에서 겨우 보리밥 한 그릇

"다시 간 곳이 내장산 근방이었어요. 당시는 달구지도 겨우 지나갈 정도로 험한 산이었습니다. 몸이 상해서 도저히 갈 수가 없더라고요. 산 초입에서 그냥 쓰러졌습니다. 어렴풋이 소달구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사람이 쓰러져있으니 세운 후 그 속에서 나를 찾아 달구지에 태웠어요. 아마도 어린애라 생각했나 봐요. 지금도 몸이 작지만 그때도 작았습니다. 가마니로 나를 덮고, 산 고개를 넘어서 가기는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죠. 마을 입구에서 달구지가 멈추더니, '사람을 살려야겠다. 꽁꽁 얼었으니 뜨건 방에 놓지 말고 서늘한 곳에 놓아라'하는 말까지 듣고 기절을 했어요." 살았다는 안도감에 희미하게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를 살려낸 마을은 장성면 북상면이었다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3일간을 누워있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부산 난민수용소를 찾아갔던 것과 그곳에서의 실상도 세밀하게 묘사하며 털어놓았다. 미군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끓여 '꿀꿀이죽'을 먹던 시절 등 전쟁과 피난, 빨치산 토벌대 등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간간히 긴- 한숨이 그간의 고통을 말해줬다.

▲ 시 '처음과 끝' 마지막 부분.

가슴 속 어머니

"어머니는 홀로 고생하면서 자식을 키웠습니다. 밤새 물레질을 했죠. 졸음이 밀려올 때면 어머니는 '내 옆에서 물레질을 도와라' 하셨어요. 그러면서 노래를 흥얼거리셨죠." 그가 8살이 되자 학교에 입학했다. 동네에서 10여 명이 매일 왕복 60리 길을 걸어 다녔다. 키가 작았던 그에게 매일 걷는 길이 무리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넌 뭘 배우네. 배운 거 얘기 해봐라' 하시기에, 제가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을 까불거리며 말했죠. 그랬더니, '그건 아니다. 내 말 따라 해라' 하시면서 한자말을 선창하셨죠. 천자문과 사자성어를 알려주셨는데 어머니는 어디에서 공부를 하셨는지 궁금해졌어요. 헌데 물어볼 길이 없었죠."

그는 '어머니 말씀'이라는 시로 그리움을 대신했다.

'오늘밤은/ 이웃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네가 지은 시나 들어보자 /'등잔불이 졸고 있는 안방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목청을 높이었다.'/ 제목 '눈이 내립니다'/ 어머님 눈이 내립니다./ 박꽃 같은 하얀 눈이/ 말없이 소리 없이/ 시집가는 색시마냥/ 곱게 곱게 내리면서/찬란한 꽃이 되어/ 하늘 가득 내립니다.'(이하 중략) '1945년 음력 11월27일, 박꽃 같은 하얀 눈이 까맣게 내리던 그날의 어머님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는 메모가 되어 있다. 

▲ 시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생, 봉사의 삶

유성노인대학 학생회장을 역임한 그는 노인대학에서 20여 년 봉사의 길을 걸어왔다. "다리가 아파서 5월부터 못 나가고 최근 다시 나갔습니다. 노인대학에서는 시국강연, 건강강좌 등 열심히 했죠. 학생회장도 8년 했고요." 지금까지 남과 다투지 않고 살았다는 그는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세계의 융합이다'고 설명했다.

피난시절 도움을 받았던 집 자녀 4명을 대학 졸업을 시키는 등 장학활동과 타자녀교육에도 솔선수범해 왔다. 전국 유람의 감상은 물론 모든 일상을 시로 남겨 시작노트만 해도 몇 권이다.

고향의 산천을 그리워해 호를 '화암(花巖)'으로 짓고, 본명을 풀어 '어진나라(國仁)'라 쓰기도 한다. "글을 쓰면 잡념이 사라져요. 시 한편으로 감사를 표현하면 모두 기뻐하며 받아주십니다. 함축된 언어로 내 마음을 전하고 정리할 수 있으니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죠. 남은 생은 원불교에서 교리공부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삶으로 잘 갈무리해야지요."

그의 시 '고향생각'이 긴 여운을 남긴다. '백운산 덕암사에/ 무리 지던 꽃 너울/ 연분홍 진달래꽃/ 꺾고 따고 먹어도/ 허기지던 춘삼월/ 구국 구국 슬피 울던/ 멧비둘기 슬픈 소리/ 한이 됩니다.' 언제고 돌아갈 고향에 대한 애잔함이 웃음 짓는 눈가에 스며있다. 그의 얼굴 깊숙이 두고 온 고향에 배어 있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