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1936)

'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咸亨洙 1914-1946 시인)

함형수는 함북 경성 출신으로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교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심한 정신착란증으로 33살에 요절하였고, 17편의 시를 남겼다.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등과 함께 생명파 시인인 함형수의 '해바라기 비명'은 암울한 시대에 생명의 의지를 강열한 이미지로 표현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그의 '신기루'는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기이하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멀―리안개낀나루끝에어느날인가소년들이보았다는그이상한혼례의행렬은그후한번도나타나지않았다우두머니모래불에섰다가도하―얀파도가밀려와서발을벗으면그만아모것도잊어버리고소년은물에뛰어들었다

광복 후 이북의 고향에서 화가 고흐처럼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던 함형수가 본 환상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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