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덕 교도
나는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상황은 절박했고, 남편의 사고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료적 치료와 산재처리 문제로 나는 맨몸으로 해결에 나서야 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남편은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없는 몸으로 건강을 되찾았고, 치료비 또한 산재로 처리됐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믿었다. 남편의 회복으로 나는 신앙이 더욱 돈독해졌고, 남은 삶을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봉사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담없이 시작한 아동센터 일이 갑작스런 센터장의 이임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설장을 맡게 됐다. 부담은 됐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대하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 되겠지'라는 희망으로 의욕적으로 다가갔다.

그 마음이 나의 행동과 언어로 표출되면서 아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소신이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런 말은 나쁜 말이니까 쓰면 안 돼" 하면서 아이들의 언행을 고쳐 주려고만 했다. 나는 스스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과의 관계에 이상한 선이 그어졌다. 가르쳐 주는 대로 하고 있는 듯했지만 자꾸만 나를 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아이들 사이에 나의 별명이 '하지마 샘', '악마 샘'으로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이 50에 봉사 삶 위해 사회복지 도전

아이들과의 갈등 유무념·1분선으로 해소

나를 피하던 아이들 입교해 법회참석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치 보는 단계를 지나 나를 무시하고 있었고,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불려서 야단을 치면 아이들은 대놓고 욕설을 하고 내 말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서 어찌할 수 없어서 부모와 전화 상담을 했더니, 오히려 그 일이 꼬여서 부모와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 결국 아이들이 센터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 이러다 보니 센터에 나가기가 싫어지고 아이들이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마음이 집에서까지 이어지자 남편은 어느 날,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힘들면 그만 둬"라며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센터에서 지낸 시간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내가 많은 잘못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도움을 받은 만큼 감사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나의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가 바로 유무념 공부였다. 우선 '매일 아이들의 장점을 하루에 다섯 가지씩 찾아서 칭찬하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았지만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아이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유념대조를 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절로 칭찬이 나왔다. 아이들을 통해 유무념 공부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렇게 아이들과의 관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지만, 뭔가 한계가 있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나를 찾아오는데 항상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만 했다. 그런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잘잘못을 가려주려고 하는 나를 보았다. 사실 나를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었고, 위로가 필요하다고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그 대화의 내용에 끌려 다니지 않고, 아이들의 마음을 먼저 읽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했다. 어떻게 하면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저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1분선을 하기로 했다.

쉽고 간단하게 생각했던 1분선은 나에게 큰 효과를 주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찾아오면 잠깐 호흡을 고르고 아이를 맞으면 그 아이가 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생각에 가리지 않고 그대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게 됐고,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니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은 아이들이 '원광'이란 공간에서 생활하고 마음공부도 하고 있다. 몇 명의 아동은 입교를 해서 일요일마다 법회에 참석하고 있고, 원광이란 말보다 원불교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돌아보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스승이고 불공의 대상인 부처님이었다.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내가 너무도 많은 것을 얻었다.

나는 지금 매일 27명의 부처님들과 함께 원불교 100년 앞두고 자신성업봉찬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울산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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