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정전〉

▲ 김준영 교무
내가 부처이며 남도 부처이고,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각각 별개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서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큰 한 몸.

그 큰 한 몸이 천지의 모습으로, 부모의 모습으로, 때로는 동포의 모습으로, 때로는 법률의 모습으로 언제나 한량없는 은혜로 보살피고 있으며, 인과의 이치가 너무도 정확하고 밝아서 속일 수도 어길 수도 없다고 밝혀주신 이 진리를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평소의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르죠. '내가 부처라니, 부처님은 법당에 가야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도 부처라고?' '크게 보면 우리가 한 몸이라고?' 지금까지 우리는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비교와 시기 질투 등으로 마음이 요란해지고, 좋은 것은 내가 가지려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괴로워 한 적이 많았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화나고 속상했던 일은 또 얼마나 많았나요? 작은 은혜나 이로움은 고맙게 여기면서도 크게 은혜 입은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사소한 것에도 불평불만과 원망심이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지어놓고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짓지 않은 복을 바라며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는 화를 내고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죠.

이런 고통의 삶을 끝내고 지혜와 자비가 가득한 부처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지금의 우리가 갖고 있는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고 바른 눈을 가져야 할 텐데요. 눈 밝은 성현들께서 먼저 깨닫고 밝혀주셨으니, 그 진리를 믿음으로 출발해서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한다면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믿음은 특별한 관심과 노력없이 생겨나지 않죠. 평소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를 중심으로, 나의 육체적인 한계에 갇힌 채 분별심으로 세상을 보는 반면 깨달은 성현들은 부분과 전체를 모두 보기 때문에 그러한 진리의 세계가 낯설 수밖에 없죠. 어디에도 끌리거나 가리거나 갇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 실상을 똑바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우리가 한 마음 문득 돌이켜 '나'라는 것에서만 자유롭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 필요

닦고 실천하기 행할 때


'일원의 진리'에 대한 믿음도 그냥 생겨날 수는 없죠. 믿어지지 않는다고, 어렵다고만 할 일이 아니라, 특별한 관심과 노력으로 알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행이라고 하죠. 닦고 실천하기를 수도 없이 하는 거 말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

우선, 우리 마음을 좀 살펴봐야겠네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어떨 때 이런 마음이 되는지, 이런 마음을 어떻게 기르고 사용하는지 의문을 갖고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밴쿠버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