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미륵사 화주 최도화는 자신이 존경하는 정산이 매양 단벌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비단 솜옷을 정성들여 지어 가지고 절을 찾았다가 정산이 미륵사를 떠나고 없음을 알고 애통해 하며, 물어물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를 찾았다.

최도화는 정산의 안내로 큰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다. 정산종사를 연원으로 입교하여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받고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삼타원 대호법의 신성과 정성은 대단했다. 대종사가 심산궁곡에서 악의악식(惡依惡食)을 하는 것이 항상 가슴에 맺히고 유감이 되어, 전주나 남원 등지로 나오면 반드시 음식을 준비하여 직접 등에 짊어지고 심산험로에 풍우를 무릅쓰고 수백리 길을 내왕하며 공양을 바치었다. 또한 어디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산중의 스승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대종사를 향한 삼타원의 지극한 신심과 새 회상을 만난 충천하는 법열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은 〈대종경〉 전망품 29장에 나타나 있다.

대종사가 설법을 할 때면 위덕이 삼천대천세계를 진압하고 일체 육도사생이 한 자리에 즐기는 감명을 주었는데, 이럴 때에는 여러 원로들과 더불어 삼타원 대호법 역시 일어나 무수히 예배를 올려 장내의 공기를 진작하며, 무상의 법흥을 돋구어 주었다. 이런 모습을 본 대종사는 그들을 가리키며 춤추고 절하는 책임을 가지고 나온 보살들이라고 칭찬했다.

원기8년 벽두 삼개월 가량과 원기9년 5월 한달 동안 대종사가 진안 만덕산에 머물 때에 일천정성을 다해 시봉의 도를 다했던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은 많은 인재를 대종사 법하에 인도했다.

최도화는 진안 전주 남원 진양 등지에 인연들을 규합하는데 뿌리가 되었다. 마령면 평지리 사람인 성타원 전삼삼과 그의 아들 내외인 혜산 전음광·동타원 권동화, 공산 송혜환, 휘산 오송암과 그 두딸 형타원 오종태·종순 등을 인도하였고, 만덕산 아래 성수면 좌포리의 김해 김씨 일가인 현타원 노덕송옥과 그 손자 대산 김대거를 연원 달았다. 전주 사람인 오타원 이청춘을 인도한 사람도 삼타원이었다.

특히 큰 연원 불사는 일타원 박사시화의 인도였다. 삼타원이 기차 안에서 일타원을 만난 것이다. 원기8년 9월경 구례 화엄사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박사시화를 전주에서 만난 것이다. 생불 소식을 접한 일타원이 대종사를 뵙고자 간절히 발원하였고, 원기9년 2월 25일 대종사 첫 상경(上京, 서울 행가) 길에 최도화가 시봉의 도를 다했는데, 일타원이 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된 것이다.

대종사, 첫 상경길에는 최도화 외에 정산 송규, 추산 서중안, 혜산 전음광 등이 따랐다. 이를 계기로 육타원 이동진화, 구타원 이공주 등 서울 인연들이 차례로 귀의하여 교단 창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을 다녀온 최도화는 아들인 의산 조갑종(義山 趙甲鍾)을 전무출신 시켜 엿장수며 농업부원으로 총부 건설에 동참토록 하였으며, 원기11년에는 자비(自費)로 경성 부기학원에 보내어 6개월 과정을 연수토록 하여 초기 교단 서무경리의 합리적인 운영에 큰 역할을 담당케 했다. 특히 교단 창립 제1대 안에 3백19명을 입교시킨 큰 연원공덕을 쌓았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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