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7

원기44년 이리교당에서 안혜삼화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안타원 안정진(安陀圓 安正眞)원로교무. 젊은 시절부터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무상'이 마음에 자리했다.

'수도를 하면서 일생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수도생활을 동경하였음은 숙겁에 도문과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살아가면서 더욱 느끼게 됐다. 수도생활하면서 공부하기를 염원했던 것을 풀기위해 당시 원불교와 인연이 있던 6촌 오빠의 소개로 원불교중앙총부가 있는 익산에 오게 되었다.

당시 보화당 안살림을 맡아 근무하고 있던 집안 친척되는 안혜삼화님을 찾아가면 원불교에서 수도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로 부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기44년 11월3일, 25세 때 입교 후 출가해 공부를 시작하려고 당시 동산선원장인 고산 이운권 법사님을 뵈었으나 방학이었다. 1달간 집에 돌아가 기다렸다가 다시 오면 된다는 기약을 했다. 동년 12월23일 연락을 받고 총부를 왔으나 25일부터 총부 동선이 시작되어 일단 1개월간 동선에 참석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전무출신 출가생활은 이후 전무출신 교육기관인 동산선원과 중앙선원을 오가며 5년의 수학기간을 거쳤다. 공부하기를 염원했고 수도생활을 동경했던 내게 선원의 수학과정은 단비가 대지에 스며들 듯 법열의 기쁨 속에 서원의 뿌리를 더욱 튼튼히 내리는 값진 시간이었다.

원기49년 동산선원 제2회 졸업식장에서 재학생을 대표하여 송사를 읽었던 구절가운데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졸업하는 언니들이여! 언니들 하고 조석으로 한자리에서 담화하고 한 선방에서 촌음을 아껴가며 구전심수하던 그윽한 그 법열도 이제는 한 토막 추억으로 남겨질 뿐입니다. 오늘날 사회 실정을 보건대 도덕이 말살되고 종교는 황혼에 이르러 전세계 인류는 구제를 갈망하는 이때에 언니들께서는 숙겁에 세운 서원으로 이 나라 아니, 전 세계 방방곡곡에 일원진리의 꽃을 피워 천하에 향기를 전파시키며 이미 닦고 닦아서 간직한 대종사님 대법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용감하게 교화일선에 나가시어 온갖 죄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리실줄로 믿습니다."(중략) 이렇게 재학생 송사를 올리고 1년 뒤 제3회 졸업생이 되어 수학과정을 마치고 제생의세 사도로서 교화일선에 나섰다.

원기50년 31세 때 처음으로 부산진교당 부교무로 부임했다. 주타원 윤주현 교무님을 모시고 시작된 교역생활은 3년 만에 부산진교당이 해운대에 연원교당을 내어 해운대교당이 세워졌고, 해운대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했다. 부산진교당 부교무시절에 지도했던 학생회원들과 함께 활기차게 지냈던 첫 교역 생활에 잊지 못할 학생회원들 중에 김성대(호적명 종대, 헌재재판관 역임)를 비롯한 성대의 단짝 친구 김근직 등 4총사는 언제나 교당에 활력이었고, 정들었던 부교무 선생님을 잊지 못해 해운대까지 찾아와서 저녁까지 놀다가 가는 정겨운 시간들이었다.

초창 부산진 연원교당 해운대교당 시절은 부산진교당 후임으로 오신성 부교무님이 부임하였으나 부산진교당에 행사가 있으면 언제나 달려가서 도와주고 생활하였기에 부산진 반교무(?)라는 농담을 들으면서 초창의 초석을 다지는 보람의 시간들이었다. 오늘날 발전의 중심가가 된 해운대교당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초대교무로 초석을 놓았던 보람을 은혜롭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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