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 당대 경전 만들어낸 사람은 대종사뿐

불경 4차 결집 때 상좌부의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 알 수 있는 고급 종교가 되어 있었고 승려들은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 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함만 누리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을 구원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는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자신들만의 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이들에 의해 AD 1세기경에는 반야 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박티 신앙의 영향으로 초기 경전에 없던 여러 가지 형태의 보살과 부처가 나타나게 된다. AD 3세기경 인도 불교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20여 종의 아비달마 승단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이 나타나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는 시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 원불교 경전과 잠깐 비교를 해보겠다. 대종사는 구도 20여년과 26세에 대각, 53세에 열반했다. 대종사의 일생에 있어서 20년의 구도과정을 제외한 28년의 교화 과정을 나는 경전 결집의 과정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대종경〉 서품 1장 대각 일성을 보면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했다. 이 대각 일성은 일원상을 표현한 것이다.

대각 후 제자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하고, 방언공사가 원기4년에 끝나는데 1년에 걸쳤다. 그 해 8월 김제 금산사에서 미륵전 위 송대에 잠시 기거하시며 그 문짝에 처음으로 일원상을 그린다.

그 당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낮에 잘 돌아다니던 젊은 스님 하나가 저녁 갑자기 혼절하여 죽게 되자 절이 발칵 뒤집혀지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때 대종사가 나와 죽은 스님 이마에 손가락으로 열십자를 긋자 죽었던 스님이 깨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금산사 주위에는 증산교가 창궐 때이다. 증산 선생의 의통으로 증산교도들은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증산교 신자들은 천사님이 오셨다고 대종사 주위에 모여드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 중에 생긴 제자들이 송적벽, 구남수 선진 등이다.
원기5년 4월에는 실상사 초당 석두암에 가셔서 교강을 발표하는데 내용이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다. 원기9년에는 중앙총부를 건설하고 정식으로 불법연구회라고 간판을 걸었다. 이 시기가 갑자년이다. 대종사는 "선후천이 개벽되는데 갑자년이 중심이 된다"고 했다.

갑자년은 3가지가 있는데 상원 갑자는 1864년에서 1924년까지이고, 중원 갑자는 1924년에서 1984년까지이고 하원갑자는 1984년부터 2044까지이다. 이 중에서 중원갑자가 가장 중요한데 원기로는 9년이며 이때 중앙총부를 익산에 건설하게 된다. 그 후 1927년에는 〈불법연구회 취지규약〉이란 최초의 교서를 만들고 그 뒤를 이어 〈수양연구요론〉, 〈육대요령〉, 〈삼대요령〉, 〈불교혁신론〉, 〈예전〉 등을 편찬했다. 원기28년(1943) 열반하기 전 모든 책을 하나로 통합하여 필생사업으로 책자를 내는데 이름이 〈불교정전〉이다. 그래서 나는 28년을 경전 결집의 생애로 보는 것이다.

교조 당대 때 경전을 만들어 내 놓은 사람은 대종사 한 분 뿐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대각 후 3년 만에 처형당하고, 증산 선생은 대각 후 7년 만에 돌아가게 된다. 이 분들은 경전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석가모니불은 48년간 설법만 하셨는데 대종사는 28년 동안 계속 수정하면서 우리 경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대종사의 대각 후 생애를 경전 결집의 생애로 보는 것이다. 원불교 수만대에 전할 경전을 당신 당대에 만든 것이다. 불교는 문자화 되는데 무려 700년이 걸렸다. 아무리 암기를 잘하고 머리 좋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말씀 원문이 그대로 전달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원불교의 경전 결집을 비교해 볼 때 우리 원불교인은 크나큰 홍복을 입었기 때문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종경〉 전망품 2장에 "인명의복활조전(人名衣服活造傳)"이란 문구가 있는데 우리 경전은 기성복이 아니라 사람 몸에 맞춘 맞춤복이라 할 수 있다.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되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첫째 구마라집이고 또 중요한 것이 현장이다. 구마라집 번역본을 구역이라 하고 현장이 번역한 것을 신역이라 한다. 대종사가 불갑사에서 구해 읽은 〈금강경〉도 구마라집 번역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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