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종교에 입문했다고 해서 진리가 그냥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려는 욕심이나 검증되지 않은 어떤 세속적 가치, 제한되고 한정적인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가리거나 끌리며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행이 필요합니다. 닦고 실행하기를 오래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그야말로 믿음에 의해 믿어왔던 진리가 비로소 이해가 되고 진정한 믿음(체득)과 신념으로 형성되는 거죠. 원불교에서는 저 동그란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것은 '둥글둥글하게 모난 곳 없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다', '지극히 공평해서 나 자신이나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본 우리들 본래 마음 상태죠. 육체적으로 한정된 나 자신만을 나로 잘못 인식하고 일으키는 모든 관념과 생각을 떠나 이 세상 전체를 한 몸 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큰 나로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인 겁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면 언제 이런 마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가만히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자주 이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누구나 부처의 성품에 머물죠. 마음이 쉬는 순간 말입니다. 그러다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마음에 어떤 자극이 와 닿으면 한 마음이 일어나죠. '이익인가 손해인가? 좋은 것인가 싫은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극히 나와 내 가족의 이익과 좋은 것을 중심으로 욕심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키죠.

다 갖추어 있다는 원만구족의 심경은 어디로 가고, 부족해서 더 가지려는 '결핍된 마음'이 되고,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움을 떠난 지공무사한 심경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 친불친에 연연하는 마음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는 남의 일을 볼 때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심경이 되죠.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자신의 문제에는 가리면서도 남의 일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환히 볼 수 있죠. 나에 가리지만 않으면 누구라도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가깝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심으로 할 때에는 이 마음이 되죠. 책을 읽을 때나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처음 하는 일이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몰입해야 할 때, 아주 위험하거나 중요한 일이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에는 이런 마음이 됩니다.

또 어떨 때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심경이 될까요?

이렇게 우리 마음이 어떨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해지며, 어떨 때에 욕심이 나거나 집착하고, 어떨 때에 편견 선입견 고집 등에 가리고 어두워지는지를 찾아보는 일에서부터 수행은 시작됩니다. 남에게 듣거나, 맹목적인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체험하는 수행이 되는 거죠.

곳곳에 보이는 동그란 일원상을 볼 때마다 새로운 화두를 삼아보면 어떨까요? '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이 어떤 마음이지? 어떻게 그 마음을 알고 기르고 양성하지?' 명심하세요. 수행의 시작은 관심입니다.

<밴쿠버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