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외교의 주축, 스승 시봉의 표본"

소태산의 9인 제자
〈화엄경〉을 보면 부처님의 대원정각의 깨달음이 활성화돼 빛으로 방광한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고 파장이 큰지 우주의 생명체들이 다 그 빛을 본다. 이 어마어마한 빛의 향연으로 비롯돼 일체중생들은 그 깨달음의 빛을 따라 모여든다. 깨달음을 빛으로 변환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화엄경〉의 주인공은 보살들이다. 수많은 보살이 등장해 평범한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구인제자들의 삶이 마치 〈화엄경〉의 보살처럼 느껴진다.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의 빛으로 말미암아 감화된 제자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구인제자를 선발해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을 통해 스승의 빛을 받아 회상을 일구도록 했다. 구인제자들의 활약은 영산과 신룡벌에서 펼쳐진 한편의 회상도(會上圖)다. 우주설법에 찬탄한 구인제자들은 소태산의 빛을 받아 현실세계에서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리얼 다큐로 보여줬다.

▲ 일산 이재철 선진.

법인기도 때 단도 준비
오체투지로 대종사 모셔
스승의 이적 체험 전해


일산, 〈금강경〉 구해오다
일산 이재철 선진(호적명 재풍, 1891~1943)은 초기교단의 대외 간판 역할을 해 왔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으로서 어떻게 모셨는지다. 사돈관계인 사산 오창건의 인도로 영산에서 생불님을 뵌 일산 선진은 즉석에서 사제의 연을 맺는다. 대종사 대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때마침 불갑사와 가까운 곳에 사는 일산에게 대종사는 비몽사몽간에 생각이 난 〈금강경〉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이에 일산 선진은 불갑사에서 〈금강경〉을 구해 온다.

군서면 남부 학정리(현 묘량면)에 살면서 30리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래가 잦아질수록 스승과 대도를 봉대하는 마음이 날로 간절해지면서 신심은 더욱 확고하게 세워진다. 원기2년 7월26일 교단 최초 남자 수위단이 조직돼 건방단원으로 임명되면서 회상창립에 정성을 다한다. 원기3년 방언조합을 설립하고 숯장사를 시작할 때 일산 선진은 대종사의 명을 받고 여러 가지 일에 동참하게 된다. 일산 선진은 유복한 집 외아들로 막일을 해보지 못했지만 방언을 위해 지게를 지며 노역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직접 갯벌에 들어가 둑을 막았고, 서툴지만 막일을 서슴지 않았다. 육신은 힘들어도 마음은 항상 스승을 향한 일편단심이었다.

오롯한 신성, 불연 맺은 함평 이씨
일산 선진의 대종사를 향한 신심은 어느 정도였을까. 일산 선진이 총부 산업부장 재임시절, 비가 내린 뒤 어느 날. 출장을 다녀온 일산은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고 대종사를 뵙고는 흙바닥에 오체투지하는 신성을 보일 정도였다. 동년배의 스승을 언제나 깍듯이 모신 것이다. 대종사가 계신 자리에는 절대로 뒷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쳐 나오는 등 절대 신성을 바쳤다. 후래 제자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신성을 배웠다.

대종사는 평소 일산 선진을 '내가 어디 갈 때는 일산을 데리고 다닐란다'할 만큼 아꼈다. 일산 선진이 스승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열반했으니 지중한 불연이다.

일산 선진은 대종사를 가까이 모시면서 수많은 이적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대종사의 상투머리를 풀어 헤치다가 니환현궁(尼丸玄宮)을 체험한 일, 곰소 객줏집 소복 여인의 대망 과보 이야기, 심원에서 곰소까지 바다를 가로질렀던 일 등이다.

일산의 출가는 마음이 서로 통했던 팔촌동생인 도산 이동안 대봉도를 대종사께 귀의시켰고, 이어 묘량면 신천리 함평 이씨 가문이 우리 회상에 귀의하는 계기가 된다. 수십 명의 재가 출가들이 배출되면서 창립기 인재의 요람이 됐다.

교단 외교·경제 제일
일찍이 일산 선진은 방언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금전 출납 방면의 능력을 대종사께 인정받았다. 이런 연유로 조합 초기의 경제 관계 사무와 외무는 거의 일산의 몫이었다. 간석지 대부 허가 문제나 금융조합과 거래 등 남다른 식견과 언변으로 해결해 갔다. 1937년 조선일보 자매지인 〈조광〉 6월호에 불법연구회의 정체 해부라는 황당한 기사가 났을 때도 조선일보사를 직접 방문해 시정 조치하는 등 외교가로서 세련된 역할을 해 냈다. 일산은 원기9년 익산총부 건설에 합력했고, 육영부 창립단원, 총부서무부장, 영산 상조부장, 영산지부장, 총부 상조부지점장 겸 공익인재부장, 서정원장으로 봉직했다. 일산은 키가 크고 신상이 좋아 '영광의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사산 오창건 선진.

지게 짐이 신성의 상징
행가하는 곳 마다 시봉
일호 사심없는 공도정신


사산 오창건(昌建) 선진의 법명
사산 오창건(호적명 재겸, 1887~1953) 선진은 소태산 대종사와 가장 허물없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사산 선진은 9인 제자 중 외모가 대종사와 닮아서 '작은 대종사'라 불렸을 뿐 아니라 대종사를 가장 많이 시봉했다. 또한 구간도실을 시작으로 영산원 대각전, 개성, 당리, 신흥, 서울, 초량교당 등 초창기 교당 신축과 수리를 감독하며 회상 건설의 기초를 놓았다.

대종사는 그의 역할을 예견하듯 원기4년 '창건(昌建)'이라는 법명을 줬다. 법명 그대로 사산 선진은 '본회 시창주 8, 9인 가운데 1인으로 가장 공훈이 많고 공심으로 유명한 제자였다'고 융타원 김영신 교무가 회고할 정도다. 건축 방면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는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도 남다른 역량을 발휘한다. 그의 나이 32세 때,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단원들과 힘을 합쳐 힘든 흙 지게를 져 날랐고, 고된 작업에 잠시 쉬는 동안에도 대종사께서 '자 시작하자'하면 맨 먼저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는 모범을 보이셨다. 가히 초기 교단의 건축 감역의 제일이라 할만하다.

대종사 시봉의 표본
사산 선진의 일화 중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지게 진 이야기다. 심지어는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종사와 제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사산은 지게 짐을 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의 여파로 원기4년 대종사가 일본경찰에 의해 영광경찰서에 연행됐을 때도 사산은 함께했다. 같은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내다가 사산은 바로 풀려났고, 대종사는 1주일 만에 영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종사가 일경의 눈을 피해 내변산 월명암으로 행가할 때도 사산이 모셨다. 대종사보다 4살 연상이지만 대각 이후 바친 신심은 일호의 사심이 없었다. 대종사께서 월명암 1차 행가에 이어 그해 10월 정식으로 변산에 입산할 때도 사산이 시봉했다. 사산은 대종사께서 행가한 변산 월명암, 석두암을 비롯해 회상 최초의 초선지 만덕산, 내장사 등을 다닐 때도 지게 짐을 지고 시봉의 정성을 다했다. 지게 짐에는 시봉할 식량을 지고 있었다. 대종사 변산 입산 때는 수년간 영광에서 육로, 해로를 통해 그곳까지 짐을 져 날라 제자로서 신을 바쳤다.

대종사께 바친 신심은 대단했다. 사산 선진이 영산 상조부장에 재직할 때 일이다. 그 당시 대종사는 익산 총부에 있었지만 동지들과 변산 봉래정사를 찾은 사산은 어귀에 이르자 '종사님, 종사님, 창건이 왔습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는 것이다. 동행했던 동지와 후진들은 대종사를 향한 신심에 큰 감화를 받았다. 사산 선진이 대종사를 어떤 스승으로 모셨는가를 보여주는 신심의 단면이다.

공심가로 알뜰한 살림
사산 선진은 전무출신 남녀동지들 사이에 세정을 잘 알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통한다. 심지어 여자동지들이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간격이 없었다. 하지만 한없이 자비롭고 인정이 많을 것 같은 사산 선진이지만 공금에 있어서는 지극히 아끼는 무서운 공심가였다. 공중사라면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때는 익산 총부에서 영광까지 걸어서 갔는데 도보로 3일 걸리는 거리를 하루 저녁 유숙경비로 떡값 5전밖에 쓰지 않았고, 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갈 때는 국수 3전짜리 한 그릇을 사서 둘이 나눠 먹을 정도로 공금을 철저히 아꼈다.

사산 선진은 원기2년 남자 정수위단 진방(震方) 단원으로 임명됐고, 공석 중이던 중앙단원의 대리 임무 봉도(奉道) 역을 맡기도 했다. 28년간 교단에 헌신한 사산 선진은 대종사를 늘 가까이에서 시봉을 했기에 교단의 중요한 일을 감역할 수 있었다. 사산 선진은 영산 서무부장, 총부 서무부장, 영산 서무·상조부장, 총부 서무부장, 전주·원평교당 교무, 총부 예감, 감찰원장, 영산지부장으로 일생을 살았다.

주세불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법인성사의 이적을 나툰 8월이다. 원기100년을 맞아 제214회 임시수위단회에서 구인선진 중 7인을 종사위로 추존하고 신앙의 축을 세웠다. 이에 본지는 9인 제자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는 일산 이재철·사산 오창건 선진, 2주는 삼산 김기천 선진, 3주는 오산 박세철·팔산 김광선 선진, 4주는 이산 이순순·육산 박동국·칠산 유건 선진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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