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에 완벽 기할 수 없어 단계적 발전 방법 찾아야
교단의 원대한 미래 내다보며 사무여한 정신 살려야

▲ 김성규 교도/분당교당
익산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해주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성찰과 각성과 인내가 필요한 것일까? 아무쪼록, 바람직한 소식이 전해오기를 기대했었는데. 그간 많은 진전을 보이는 듯 했던 교헌개정논의가 어쩌면 원점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좀 더 멀리 내다보고, 보다 많은 시간 더 깊고 진지한 논의가 필요했었는데, 우리가 너무 서둘러 '교단중흥(中興)'이라는 명제에 집착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안목이 그리고 지혜가 그만큼 의욕과 기대에 못 미친 것일까?

우리는 또 하나의 '100년의 약속'에 설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헌개정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해왔다.

혹시라도,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100년 역사 속에서, 혹은 우리의 정체성에, 또 혹은 우리의 교단운영체제에 미흡했던 점은 없었는지를 삼고사려(三顧四慮)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소태산대종사의 크신 이상과 포부에 우리들의 외신(外身)과 내심(內心)의 행상(行像)이 빛을 더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래왔다. 하여, 경산종법사께서도 신년법문을 통해 '어제를 거울삼아, 오늘을 새롭게, 내일을 희망차게' 교단의 새 역사를 열어가자고 격려해 주시지 않았던가!

익산으로부터의 소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금 우리의 현실상황과 미래에 대한 안목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우리의 현실상황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포부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보다 더 깊게, 보다 더 넓게, 보다 더 멀리 이해하고 궁리하며 더 많이 소통하고 '창자를 맞댔어야' 했었는데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제 우리교단은 보다 견실한 주세교단으로서의 포부와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중대한 시점에 와있다고.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교단의 현실을 보다 냉철하게 돌아보고, 명실상부한 대의와 정법의 수호자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실력과 역량을 갖춘 교단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나가는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항상 '우리교단, 지금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만을 던지며 전전긍긍해야 했었다.
우리는 그러기에 저 '새로운 100년'을 위한 특위의 취지와 목표에 더욱 절절히 공감하고 더욱 크게 기대를 가져왔던 게 아닌가. 그러나 '변화와 개혁'이라는 게 어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한 체제변화와 시스템개혁 등을 전제로 할 수도, 또는 원대한 미래를 위한 단계적 발전방향도 충분한 논의와 토의의 대상이어야 했으며,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아무쪼록 부단한 소통을 통하여 가장 바람직하고 원만한 대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니던가!

이유야 어떻든,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익산소식에 대한 우리의 조심스런 원려(遠慮)가 되었다.

그러나 백보를 앙보해도 우리는 결코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교단의 미래를 위한 우리의 본의다. 그리고 우리교단의 인화와 단결이다. 일체의 만법은 모두가 인연화합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우리교단의 원대한 미래를 내다보고 사무여한의 정신을 되살리자. 그리고 우리는 항상 일원의 대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말자. 다시 말하거니와, 일거에 완벽을 기할 수는 없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또는 단계적 발전방법을 찾는 게 순리다.

산고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훌륭한 옥동자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는 보다 큰 전진을 위해 또 하나의 큰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조금 늦더라도 때로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인내와 지혜도 돌아보는 여유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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