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부안 변산 제법시절, 측근에서 시봉의 도리를 다한 송적벽과 김남천은 친구였다. 이 두사람은 원래 증산 강일순의 제자들이었다.

하산 송적벽(夏山 宋赤壁, 1874∼1939)은 충청도 사람으로 인정 많고 무슨 일에 나서길 잘하며, 흥분을 잘하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길쭉하고 검붉은 편이었다. 증산 선생을 믿고 따르게 되면서 김제군 원평으로 옮겨와 엿방의 물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증산 천사를 받드는 점에 있어서는 맹목적이리만치 충직한 신앙을 가졌다.

송적벽이 대종사의 제자가 된 것은 정산 송규 종사와의 인연으로 비롯된다. 정산종사가 가야산 일대에서 구도를 할 때에 증산도 도꾼들을 만나 원평 송찬오(적벽의 호적명)를 찾아가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송찬오는 당시 태을교(太乙敎, 증산교의 한 갈래) 도꾼들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송찬오를 통하지 않고는 이름있는 도꾼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금산사 길목의 원평에서 엿방을 하는 관계로 그의 집에 도꾼들의 내왕이 잦았고, 각처에 행상을 나가는 엿장수들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을 기회가 많아, 자연 도꾼들 사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교도원명부〉의 남자부 20번에 원기 4년 음력 8월 20일에 송찬오가 정산종사의 연원으로 대종사의 입문제자가 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김남천도 같은 날에 송적벽의 지도로 입문했다.
법인성사를 마치고 대종사가 김제 금산사를 행가한다. 금산사 초행길에 송적벽이 운영하는 원평 엿방을 먼저 찾고, 그의 주선으로 금산사 송대(松臺)에 거처를 정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송적벽은 김남천과 더불어 변산 월명암을 찾아 대종사를 가까이서 모시기를 발원한다. 이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대종사, 실상사 옆 초당을 매입하여 임시 거처를 정하고, 원기 6년 7월에는 실상초당 윗편에 몇 간 초당을 짓기 시작한다. 송적벽은 석벽을 쌓고 벽을 바르는 토역(土役)이 능하여 목수인 김남천과 더불어 역할을 맡아 9월에 석두암(봉래정사)을 완성한다. 이후 두 사람은 원기 8년 10월경에 완공한 영산성지 영산원 건축에도 역할을 하고, 원기 9년 익산총부 건설 당시 최초건물 도치원을 짓는데도 함께 했다. 불법연구회의 토수는 송적벽이요, 목수는 김남천이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송적벽은 증산계열의 많은 여신도들을 대종사 문하에 인도했다. 구남수, 송월수, 장정수, 김정각 등을 인도했고, 구남수가 이만갑을, 이만갑이 장적조를 인도했다. 이타원 장적조는 부산을 비롯한 영남교화에 큰 역할을 한 만큼, 송적벽의 연원지도 공덕은 교단 창업기에 큰 몫을 담당한다.

각산 김남천(角山 金南天, 1869∼1941)은 50세가 넘어 대종사 법하에 들어와 노구를 이끌고 익산 총부 건설 까지 신성을 일관하며 많은 일화를 남긴다. 김남천은 전주 사람으로 대종사 변산 제법 시절에 홀로된 딸 김혜월(金慧月)과 외손녀 이청풍(李淸風)으로 하여금 대종사를 시봉토록 했다. 또한 종질녀인 오타원 이청춘이 익산 총부 건설 당시 논 70두락을 희사하여 당시 간고했던 총부 유지 대책의 활로를 열게 된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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