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8

 


의식있는 젊은층 교화 위해

적십자봉사대 월례회 열어

성가대와 문화교화 터 마련


초창 해운대교당 근무를 3년간 마치고 원기56년 37세로 이웃에 있는 김해교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다.
당시 읍소재지인 김해는 김수로 왕릉이 있고 가락국 문화의 전통과 불심이 조화롭게 자리한 교화의 터전이었다. 초대교무이신 함타원 송영지 교무님의 뒤를 이어 선타원 한제선 교무님이 교당건축을 마무리하여 깨끗한 양옥 슬래브 건물이 김해시장입구, 교통과 상권의 중심에 자리했다. 발전 전망이 밝은 교당이었다.

부임 이듬해에 일반법회에 나오는 학생 몇 사람과 교도자녀들을 모아서 원기57년에 학생회 창립법회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70~80명의 학생회로 성장하면서 학교간부의 우수한 학생들이 교당의 간부로 연결됐다.

당연히 학생회에 큰 활력을 가져왔다. 이때 전무출신을 서원한 김진성 교무를 시작으로 김덕수, 이삼덕, 오선명 교무 등이 줄을 이었다. 출가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그때 시작된 인재발굴의 못자리판이 청소년 교화에 쏟은 열정으로 결실되어짐을 보면서 교역생활 중 큰 보람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대학을 진학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청년회가 이어서 조직되었고, 그 인연들이 일반법회까지 전국 교당에서 주인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청소년 교화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김해교당 일반교화에 활력을 넣기 위해서는 김해지역에 적십자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의식있는 젊은 세대를 교당에 나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염원을 했다.

매월 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적당하지 못해 애로가 많음을 알고 기꺼이 적십자봉사대 월례회를 김해교당 법당에서 가질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적십자 고문으로 있으면서 변함없는 정성으로 장소를 제공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대함을 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불교에 호감을 느낀 임원들이 원불교 교도가 되기 시작했다. 변성원 교도를 비롯한 총무였던 박덕윤 교도는 교단에 소중한 주인이 되었고, 서김해교당이 세워질 때 주역으로 두 분 모두 차례대로 교도회장으로 교당발전에 큰 공적을 심게 되었다.

내 나이 30대말 40대 초의 활력 넘치는 교화생활은 김해교도소 교화까지 개척교화의 터전을 확대했다. 학생회 성가대를 조직하여 학교 음악선생님을 초청해서 성가경연대회에 나가는 문화교화의 터전도 마련했다. 또한 매주 일요일과 방학을 이용하여 김수로 왕능 공원 청소와 봉사활동은 학생들에게 봉사의 기쁨을 심어주었고 봉사활동을 계기로 많은 학생들이 교당에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일 김수로 왕능이 가꾸어지면서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읍장의 표창을 받았다. 또 유료화 된 공원에 원불교학생들은 무료입장하도록 했다. 김해지역에 원불교를 심는 활동들이 결실을 거두는 보람의 시간들이었다. 김해교당 6년의 임기를 마치고 인천교당으로 이동했다.

원기62년 43세에 인천교당으로 부임했다. 동기교무였던 서숙정 교무님이 병고에 시달리다가 교당에서 순직하는 아픔이 있는 교당이었다. 교당은 피폐하였고 교당 문을 닫기 직전이라 자원을 해서 인천교당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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