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 김준영 교무 / 밴쿠버교당
종교에 입문하였다 해도 참된 이치를 믿고 그 이치를 따라 마음을 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가 쉽게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확고히 믿어지지 않는 낯선 가치를 실천하기는 더욱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발원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말이죠. 살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 밝은 성현의 안목으로 제시된 법을 따라 살아가리라는 그 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말입니다. 이 큰 서원을 일으키고 지속하는 일이 사실은 마음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한 발원이 없다면, 아무리 교당을 다니고, 절이나 성당, 교회를 다니더라도 성현들의 본의에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문에서는 그 발원을 일으키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 하죠. 실제로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시작할 때에는 스승을 만나게 해달라는 발원부터 수행에 매진할 수 있기를, 마장이 없기를, 이 수행의 공덕이 일체중생에게 두루미치기를 하는 등등의 발원을 하며 수행에 매진해 왔습니다.

원불교에도 창교자이신 소태산 대종사께서 직접 제정하신 '일원상 서원문'이라는 전 교도의 공통된 발원문이 있죠. 원기 23년에 발표된 '일원상 서원문'은 원불교 각종 의식에서 독송되며 전 교도의 발원을 촉구하며 서원을 진작하고 있습니다.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 초월의 생사문인 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서원함."

진리란 말로써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안에서 만물이 나오고 사라지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근본이자 그 자체이며, 깨달은 자나 깨닫지 못한 자들의 본래 마음입니다. 머물러 있는 측면에서 보면 늘 그러하고, 변하는 측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이 생겨나고 머물고 죽고 사라지며 끊임없이 변하죠. 그리고 그 변화는 누군가의 의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심신작용 여부에 따라 진강급이 결정되고, 때로는 은혜에서 해로움이 나오고 때로는 해악에서 은혜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진리를 본받아서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용하며,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라도 강급이 되거나 해독은 입지 말아서 진리의 위력을 얻고 결국에는 진리 자체에 합일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결국 진리를 알아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지키고 사용하여 은혜와 위력을 입고 나날이 진급해 가고자 하는 발원문인데요. 어떠세요? 이런 간절한 마음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납니까? 그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하게 와 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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