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견성제자, 선시(禪時)교무, 부산교화의 시초

▲ 삼산 김기천 선진.
▲ 원기19년 10월31일 부산 하단지부에 의해 신설된 남부민 회관 건축 기념 사진. 2열 중앙에 소태산 대종사와 삼산 김기천 선진(좌)이 앉아 있다.
삼산 김기천 선진(호적명 성구, 1890~1935 이하 삼산)은 대종사가 최초로 견성 인가한 제자다. 성리뿐 아니라 사리에도 밝아 교단 발전을 위한 의견 제출에도 적극적이었다. 영산출장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부산교화의 시작인 하단지부에 첫 교무로 부임해 교화에 헌신했다. 46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교단 최초 견성제자, 동·하선 지도교무, 문예가, 대공심가로 대종사의 총애를 받았다.

삼산 선진은 원기49년 제9회 임시수위단회에서 출가위로 사후 추존됐으며, 원기62년 종사 법훈을 받았다. 삼산 선진의 생애를 둘러보자.

마을 훈장과 대종사의 만남

삼산은 구수산 천장봉 아랫마을 천정리 천기동에서 자랐다. 13세에 한문 문리를 얻고 17세부터 마을 훈장을 했다. 그러던 중 사돈인 팔산 선진으로부터 대종사의 대각 소식을 전해 듣고 길룡리 범현동 이씨 제각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대종사를 뵙고 '과연 도통을 했구나' 하고 크게 감복해 여섯 번째 제자가 됐다. 대종사가 대각한 그해 원기 원년 5월21일의 일이다.

신심을 발하다

하지만 삼산의 초기 신성은 그리 깊지 않았다. 원기2년 여름, 삼산은 학질에 합병증까지 겹쳐 심한 병고를 앓게 된다. 은연중 대종사가 병을 고쳐주겠지 하는 마음을 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산은 처음 8인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오내진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주색에 방탕한 것을 보고 대종사에게 보고했다. 대종사는 "오내진의 전도를 미리 판단하지는 않겠으나 그 맹세가 진심이었다면 어찌 무단한 허언에 그치겠는가"하고 크게 나무라지 않자 삼산이 실망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 오내진이 술에 잔뜩 취해 밤에 집 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삼산은 대종사에 대한 의구심을 내려놓고 이후 오롯한 신성을 바쳤다.

천정조합으로 시험 치르다

삼산의 성품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매사에 잘 동하지 않고 끈질기고 진중했다. 원기4년 8월21일 삼산은 구인선진과 더불어 '백지혈인'의 이적으로 법인성사를 나투어 대종사로부터 법명과 법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삼산 김기천으로 불렸다.

삼산은 원기7년 대종사가 8년간 회상 창립 준비로 변산 봉래정사에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을 규합해 저축조합을 본뜬 천정조합을 설시했다. 그는 이 조합을 잘 운영해 서서히 대종사의 법하에 참예시킬 생각이었다. 동네 훈장을 한 탓에 인망이 두터워 오전에는 예회, 오후에는 목화밭 공동작업, 밤에는 야학을 열었다. 나중에 대종사가 이 사실을 알고 "지금 이 일이 작은 일 같으나 앞으로 큰 해독을 미침이 살인강도보다 더 클 수도 있다. 나중에 삼산이 함정에 빠진 후에는 내가 아무리 건져 주려 하여도 건질 수 없게 된다"〈대종경 선외록〉며 크게 경책했다. 스승의 본의를 헤아린 삼산은 바로 천정조합을 해체하고 조합원들을 길룡리 저축조합에 편입시켜 대종사 문하로 인도했다.

초대 영광출장소 소장

원기9년 불법연구회가 창립돼 익산 마동 보광사에서 총회를 열었다. 이날 삼산은 영광지역 대표로 참석해 '재가·출가 선법과 솔성요론'을 주제로 설법했다. 대종사 외에 공식 모임에서 설법한 제자는 삼산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공부가 깊었고, 대종사의 신망이 두터웠다. 삼산은 창립 총회 후 영산출장소 초대 소장 겸 서무부장을 발령받아 35세부터 4년간 영산에서 근무했다.

끊임없는 구도열정

원기13년 5월15일은 제1대 제1회 기념총회가 열렸다. 첫날에는 재가회원인 조송광이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됐다(후보 삼산과 일산). 그다음 날 사업성적 우수 유공인 표창식에서 삼산이 이공주 선진과 함께 2등 유공인으로 선정됐다. 대종사는 이날 표창을 마치고 "후진들은 선진들에게 늘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나서 업어서라도 받들어 주어야 할 것이며, 선진들은 후진들에게 또한 늘 감사하고 반가운 생각이 나서 업어서라도 영접하여야 할 것이다"고 당부했다. 17일에는 공부등급 고시에서 김기천과 함께 송벽조·송규·송도성·이동진화·이공주가 정식특신급에 승급했다.

삼산의 구도열정은 영산출장소에서 빛을 더했다. 동과 정 어느 때든지 의두를 들고 선하기를 즐겨하고, '나의 무기는 인내다'라는 강연은 〈월말통신〉 3호에 소개돼, 대종사 다음으로 공식문서에 제자 법설이 첫 게재됐다. 삼산의 지혜와 고심은 교단발전을 위한 의견 제출에도 표출됐다. 한 예로 '2대 총회에서 농업부 창립단원은 창립 단금 목표액 1만원씩을 저축하자'고 단회에 제출해 조실로부터 '갑(甲)'을 받았다.

최초 견성제자

원기13년 가을, 어느 날 대종사가 강당에 법좌를 차리라 하고 대중을 모았다. 이날 대종사는 "견성을 하려면 성리공부를 하여야 한다"며 제자들에게 각각 의두요목을 주고 성리로 답하게 했다. 수많은 제자들 중 오직 삼산만이 대종사에게 흡족한 웃음을 짓게 했다. 대종사는 "오늘 내가 비몽사몽간에 여의주를 얻어 삼산에게 주었더니 받아먹고 즉시 환골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대종경〉 성리품22장)며 새 회상 창립 이래 공식적으로 첫 견성 인가를 내렸다. 삼산의 나이 39세다.

견성 인가 후에도 삼산은 성리연마에 더욱 정진하여 '교리송' '사은 찬송가' '심월송'을 발표해 후일 〈성가〉에 수록되게 했다. 대표 저술로는 출가수행자의 입문서인 〈철자집〉이 있다.

부산교화에 총력, 원기20년 열반

삼산은 원기17년에 부산 하단지부가 창설돼 초대 교무로 임명받았다. 그때 나이 43세다. 삼산은 부산교화 2년 만에 남부민동에도 출장소를 마련해 김영신이 여자 전무출신 정녀로서 최초로 지방교무로 부임하게 했다. 또한 삼산은 원기19년 여름부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해, 야학생인 양도신이 이듬해 전무출신 하는 데 기여했다.

원기20년에는 교화가 성장해 초량 등지에도 교당을 세우고자 염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티푸스에 감염돼 부산 하단지부에서 그해 9월6일 46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삼산은 열반을 앞두고 김영신에게 "내가 지방에서 수년간 지내보니 옛적 8~9인 동지와 종사부주(대종사) 슬하에 있던 때가 그립구나"하고 회상했다.

대종사, 삼산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금강산 일정을 취소한 뒤 총부에 돌아와 대중에게 장례준비를 시켰다. 9월6일 새벽3시경 '하단 삼산교무 열반'이란 전보가 배달됐다. 대종사 대중을 이끌고 대각전에 나가 좌정한 뒤, 한참 동안 심고를 올리고 "가는 기천도 섭섭커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소" 하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허허…"하고 통곡했다.

삼산 김기천 선진는 불법연구회 서무·교무부장, 하단 교무,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삼산은 슬하에 세 딸을 두어 막내딸 양화의 자녀 정귀원·정인덕 교무가 현재 전무출신으로 봉직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법인성사의 이적을 나툰 8월이다. 원기100년을 맞아 제214회 임시수위단회에서 구인선진을 종사위로 추존하고 신앙의 축을 세웠다. 이에 본지는 정산종사 외 9인 제자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는 일산 이재철·사산 오창건 선진, 2주는 삼산 김기천 선진, 3주는 오산 박세철·팔산 김광선 선진, 4주는 이산 이순순·육산 박동국·칠산 유건 선진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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