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송적벽과 각산 김남천은 막역한 친구사이다. 증산도 도꾼들로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여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시봉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지내던 이들이 하루는 심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송적벽은 변산을 떠나게 된다. 당시 상황이 〈대종경〉 실시품 3장에 나타나 있다.

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실 때에 하루는 저녁 공양을 아니 드시므로 시봉하던 김남천·송적벽이 그 연유를 여쭈었더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에 있으매 그대들의 힘을 입음이 크거늘 그대들이 오늘 밤에는 싸움을 하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떠나갈 터이라 내 미리 밥을 먹지 아니하려 하노라." 두 사람이 서로 사뢰기를 "저희 사이가 특별히 다정하온데 설령 어떠한 일로 마음이 좀 상한들 가는 일까지야 있겠나이까, 어서 공양에 응하소서."하더니, 몇 시간 뒤에 별안간 두 사람이 싸움을 하며 서로 분을 참지 못하여 짐을 챙기다가 남천은 대종사의 미리 경계하심이 생각되어 그대로 머물러 평생에 성훈을 지켰고, 적벽은 이튿날 아침에 떠나가니라.

송적벽은 대종사가 금산사에 잠시 머무를 때 갑자기 실신한 어떤 사람을 회생시켰다는 신통력을 전해 듣고 발심을 했다. 송적벽은 천지도수(天地度數), 음부공사(陰府公事) 등 개벽사상과 신비한 자취를 구하는 신앙에 주력하던 사람인데, 대종사가 변산에 입산한 이래 줄곧 불법(佛法)에 주체하여 성리(性理)를 주로 설하매 자못 실망을 했다. 그러던 중 친우 김남천과 더불어 심한 의견 충돌이 있어 변산을 떠났던 것이다.

송적벽은 친구 김남천과의 일시적 분을 참지 못하여 대종사의 법하를 떠나 왔으나 원기9년(1924) 봄에 이웃에 사는 독실한 기독교 장로인 한의사 경산 조송광(慶山 曺頌廣)을 대종사와 만나도록 주선하였고, 익산 본관 건설에도 참여하여 총부 유지 대책의 한 방법인 엿곱는 일에도 도움을 주었다. 송적벽이 원래 김제 금산사 아래 원평에서 엿방을 운영한 사람이니 만큼 불법연구회 창립 당시 엿장사를 하는 일에 아이디어 제공과 운영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송적벽은 한 때 꽃발신심으로 증산도 계열의 신도들을 대종사 문하로 이끌었으나, 간고한 회중 살림에도 대종사가 큰 능력(신통묘술)을 발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통과 이적을 성말변사(聖末邊事, 성인에 있어서 하찮은 일)라 하여 대기(大忌, 크게 꺼림)로 경계하여 건실한 도덕회상으로만 나아가는 것을 보고 교단의 앞날을 비관하고 차츰 발길을 끊었다.

그후 송적벽은 원기13년 제6회 평의회 의결에 의해 제명처분 되었다. 그러나 대종사는 어느 한 기간 동안의 그의 뜨거운 열정과 신심을 인정하여 원기18년에 송적벽에게 하산(夏山) 법호를 주었다.

범산 이공전 종사를 통해 송적벽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증산도 계통에서 원불교가 발전하는 것은 송적벽이 대종사께 귀의할 적에 증산 강일순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목침을 가져다가 대종사께 바쳤는데, 원불교가 그 목침을 원광대학교를 세울 때에 건물 주초에 넣어서 그렇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송적벽이 대종사 문하를 떠나가며 가져왔던 목침을 되돌려 갔다고 한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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