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엄마는 내려놓는 공부 중'
20년째 한결같이 원음합창단·교정교화 봉공
구치소에서의 별명 '우리 직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청년보다 더 활기찬 신앙생활 중인 금천교당 진타원 김시명(64·眞陀圓 金是明)교도,. 그의 이름 세 글자는 '원음합창단의 터줏대감', '교정교화의 산증인'과 함께 '밥 참 맛있는 부지런한 엄마'로 표현된다. 일주일이면 4~5일은 교단 일에 걸음하는 그는 찜통같은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은혜의 터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3대째 신앙을 이어온 일원가족이자, 손주들에게까지 5대째 신심을 물려주고 있는 그의 신앙에 대한 첫 기억은 총부 감나무와 소복이다. "여섯살쯤 됐을까요, 할머니(고 소부용화 교도)와 엄마(이창주 교도)를 따라 총부에 갔는데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어요. 당시에는 교도들도 다 하얀 소복을 입고 기도했는데, 감은 주황색으로 쏟아질 듯하지, 어른들은 하얗지, 어린 눈에도 환상적이었지요."

태어나 이리교당 입교, 나이만큼의 신앙이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원칙도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기도복' 문화만큼은 꼭 되살리고 싶어 그 자신이 굳건히 지켜가고 있다. "언제나 법복 아래 흰 소복을 입고요, 안되면 흰 블라우스에 긴 치마라도 입지요. 얼마전 동생이 법호를 받을 때도 일부러 그 옷을 지어 보냈어요."

추억은 이어진다. 교당 옆에 큰 연못이 있어 어린이법회 후 금붕어를 보곤 했다는 것, 또 어머니가 반찬을 하면 꼭 그날 형제들을 시켜 교당에 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김정은 교무가 있었던 이리교당은 그에게 놀이터이기도, 제2의 집이기도 했다. "그러다 인천으로 이사를 왔는데, 교당이 없어서 온 가족이 낙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장에 갔다가 저 멀리서 교무님을 본 거예요. 심부름 한 것도 팽겨치고 막 달음질하니 마침 인천교당을 창립하려던 서숙정 교무님이셨어요."

이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갔을 둘째딸의 자태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어머니는 인천교당 창립유공인이 됐고, 그의 가족은 신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직장 다닐 때는 교당에서 3년을 살았어요. 교무님 수발도 하고 회계도 했죠. '나는 전무출신 해야 하는가 보다'하고 갔는데, 왠걸, 결국 그 복은 내생을 기약해야죠."

그러나 결혼할 때도 예비사위에 대한 엄마의 조건은 "원불교 안 다닐 거면 결혼 못 시킨다"였으니, 그를 만나 입교한 남편 김진원 교도는 훗날 금천교당 부회장까지 하며 약속을 지켜왔다. "저도 아들들에게 그래요. 집도 교회 옆에는 얻지 마라, 교당 같이 다닐 며느리 만나라고요."

원기73년 서울원음합창단에 들어가 단장까지 역임한 것도, 원기80년 교정교화를 시작해 현재 교정교화협의회 서울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그 은혜를 갚기 위함이다. "봉공회에 와 보니까 길광호 교무님이 구치소에 갈 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어요. 구치소랑 집이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손을 들었지요."

이상하게도 무섭거나 꺼려지지가 않았다. 철문 열고 들어가면 재소자들 수십 명이 앉아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는 일 없이 그냥 갔다오는 일이라지만, 20년을 한결같이 해왔다. 대화는 할 수 없지만 눈으로 인사를 하고 안 보이면 서로 찾는 무언의 두터운 소통도 나눈다.

"경비교도대(교도관) 생일잔치를 같이하며 인연을 쌓고 공을 들여요. 남부구치소가 이전했을 땐 벽 그림을 부탁해, 강해윤 교무님이 100여 점을 모아 보내주셨죠. 최근엔 나선정 전국교정교화 회장님이 부채를 8천개 희사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다보니 남부구치소도 10년째 들어가고, 남부교도소에도 곧 교리교실을 시작해요."

많은 노력과 인연이 필요한 구치소와 교도소 교정교화. 법회나 교리교실뿐 아니라 검정고시 대비 수업도 진행하며 재소자들의 새로운 삶을 돕고 있다.

"강해윤 교무님이 그러셨어요. 죄 지었다고 사회가 외면하면 어떻게 되겠냐, 그러니 종교인들이 나서서 보듬어줘야 한다고요. 교정교화는 결실이 쉽지 않은데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나는 중간 역할만 할 뿐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구치소·교도소 측과 교무, 봉사자들을 조율하느라 바쁜 그. 남부구치소에서는 그를 아예 '우리 직원'이라고 부른단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원불교인들의 모임에서도 유가족들에게 밥 공양을 한다길래 엄마로서 참여했어요. 반찬 몇 가지 하는 건데요, 뭘."

'반찬 몇 가지'였다는 그가 진도 팽목항까지 달려간 것은 단지 엄마였기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 하도 게을러 별명이 '할머니'였다던 그가 '부지런쟁이'가 된 건 그 마음 바닥부터가 이미 신앙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놓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금천교당에 김주영 교무님이 오셔서 일원상서원문 등 7개를 한문으로 사경하라 하셨거든요. 100번이 넘으니 그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합창단, 교정교화, 교당에서 행복했지만, 그걸 잘 물려주고 떠나는 공부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늘 좋은 사람들과 은혜 속에 살았다는 김시명 교도. 상도 없이, 티도 안나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는 적공으로 살아온 그는 이제, 이별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잘 늙을까'를 늘 화두삼아 매일 기도와 선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에게서, 착 떼고 상 다스린 아름다운 선진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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