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9

가는 곳마다 교화 외길

터전 가꾸는데 오직 일념

소중한 법연 이어져

인천교당 부임해 보니 양식이 떨어져서 보리쌀 2되와 쌀 3되를 팔아서 근근히 교당 살림을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그 어려운 상황속에 15명으로 시작된 교화가 차츰 교도수가 증가해 남자가 3단, 여자가 7단,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서울교구장인 이산 박정훈 교무를 인천교당에 설법 법사로 초청했다. 박 교구장은 달라진 인천교당 모습을 보고 "내가 서울사무장 시절 서숙정 교무님 계실 때 와서 보고는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주변의 집들을 매입하여 140평, 또 170평을 사들여 오늘의 인천교당 면모를 갖추도록 기초를 닦는데 8년의 시간을 인천교화에 열정을 쏟았다. 부부법회를 활성화 시켜서 젊은 교도를 유입하고, 학생회를 창립하고, 어린이훈련을 통해 어린이법회 터전을 닦고, 김해에서부터 시작한 교도소 법회는 인천소년교도소가 있어 2년간 다니면서 사회교화에도 정성을 보태었다.

이후 대구 대현교당에서 5년, 서울 방배교당에서 5년 등 가는 곳마다 인연따라 교화의 외길로 터전을 일궈 왔다.

회갑이 되는 61세, 원기80년도에 마지막 근무지인 전주 동산교당으로 부임했다. 원광유치원이 있어서 함께 운영하면서 유치원 직원이었던 김수원 교사와 통학차량을 담당했던 전진원 기사가 거룩한 서원을 세우고 전무출신하여 교단에 봉직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는 곳마다 출가의 인연들이 때를 따라 나와서 대도회상에 일꾼으로 인도되었음이 나의 교역생활에 큰 보람 중의 하나다.

동산교당을 끝으로 마지막 퇴임을 하면서 제자들이 엮어준 〈안타원 안정진 교무 퇴임 기념문집, 아름다운 42년〉 한 권의 책을 고운 미소로 바라보며 마지막 정양기관인 수도원으로 향했다.

황혼의 아름다움을 낙조가 붉게 물들이듯 기쁨과 보람과 행복했던 시간들을 가슴 한가운데 곱게 간직하면서 내생을 기약하고 있다.

교역에 임하며 기쁨 넘치는 신앙체험담이 많이 있다. 그 중 부산진교당 부교무 시절 학생회원 김성대는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해운대교당 초대교무로 이동하고 나서도 몇몇 친구와 방학이면 해운대교당을 다녀가곤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교무님께는 먼저 인사드리고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 물으면 "광안리에서 배를 탔는데 배가 그냥 여기로 데려다 주대예"하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교역의 첫 인연들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다가 김해교당으로 이동하고 나서는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김해교당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김성대 청년이 불쑥 찾아왔다. 5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동안 사법고시에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이 방황하다가 군복무를 군법무관 시험이 합격되어 김해 대저공군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성대 청년의 집이 부산 광안리인데 대저와 가까운 구포에서 하숙을 하고 있으며, 구포교당이 있어 찾아가서 법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임남열 교무님이 계셨는데 안정진 교무님 행방을 여쭈었더니 가까운 김해교당에 근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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