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진리적인 삶을 꿈꾸며 한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라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수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각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는 '균형감각' 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나,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병행' 사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생활과 수행, 나와 너, 인간락과 천상락에 대한 탄탄한 균형감각은 수행자가 범할 수 있는 각종 오류로부터 단단히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생활을 떠나지 않는 수행'이어야 하며, 나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너의 행복도 소중하고, 인간으로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나 명예, 성공도 소중하지만 진리를 믿고 그 이치를 따라 소박하고 바르게 사는 것 또한 가치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이미 수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실제적인 수행을 시작할 때에는 수양과 연구라는 두 다리의 힘을 길러야 하죠.
그 중에 '닦고 기른다'는 수양은 우리의 본래 성품을 회복하는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욕심이나 집착으로 끌리거나 흔들리고 화나거나 두려운 그 마음 이전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이익이나 편의, 내가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핵심입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죠. 때로는 그 마음을 흔드는 경계를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좋다 싫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한 마음으로 그 일 그 일에 집중하며, 때로는 염불이나 좌선으로 염불 문구나 호흡, 단전 등 하나의 경계에 집중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단지 고요히 쉬는 겁니다.

단지 고요히 쉬기만 해도 드러나는 우리의 본래마음이 왜 그렇게 쉽게 흔들리고 요란해지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그렇게 분주하고 흔들리게 하는 걸까요?

'무명(無明)이라고 하죠. 밝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라는 어둠에 가려서 환하게 비춰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이름 붙여진 그 나와 가족의 안위와 이익과 명예만을 위해 욕심을 부리고 집착을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양은 어리석음이라는 어둠을 타파하는 지혜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일과 이치를 연마하고 궁구하는' 연구를 통해 밝아진 지혜는 욕심을 내야 할 것과 욕심 내지 않아도 될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죠.

연구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일입니다. 나의 실체와 세상의 일과 이치를 내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할 때에 그 일 그 일에서 지혜를 밝히고, 때때로 지도인이나 도반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무슨 일이든지 의문이 드는 일이 생기면 끝까지 그 의문을 해결하도록 노력을 하고, 때때로 일과 이치를 밝혀 놓은 성현의 경전을 읽고 연마하며 지견을 넓혀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수양과 연구의 두 다리를 튼튼히 하고, 양 날개에 힘을 실으면 수행자는 비로소 한 마리의 새처럼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죠.

생각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날개는 어떤 날개를 달면 좋을까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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