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산 서중안 대호법

부안 내변산에서 수양하며 새 회상 공개를 준비하던 소태산 대종사가 그 뜻을 펼 수 있는 인연을 만났다. 김제 사람인 춘산 서동풍(春山 徐東風, 1868∼1925)과 추산 서중안(秋山 徐中安, 1881∼1930)형제가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게 된다. 형인 서동풍이 먼저 제자가 되었다. 원기6년 이타원 장적조의 인도로 변산 봉래정사를 찾았다. 서동풍은 김제시 금산면 사람으로 동생인 서중안의 도움으로 한약방을 운영했다.

서중안(호적명 상인)은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진취적 사상을 가져,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의서(醫書)를 탐독했다. 28세부터 6년간 성덕면장을 하며 지역 민심을 얻었다. 서중안은 그후 '인화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한의사로 재력을 가졌다. 원기8년 부인 칠타원 정세월(七陀圓 鄭世月)과 함께 형인 서동풍의 인도로 봉래정사를 찾아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당시 상황이 〈대종경 선외록〉 사제제우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다.

상인(相仁)이 즉석에서 옛 인연을 깨닫고 돌아가신 부모를 새로 만난 듯 흐느껴 울며 대종사보다 열살이나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영부(靈父)로 모시기를 애원하였다. 대종사 허락하시니, 상인이 사뢰었다. "이 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하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의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대종사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 말씀하시었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상인이 사뢰었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대종사 드디어 허락하시고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 여실 준비를 시작하시었다.

대종사로부터 새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하명 받은 서중안은 정산종사를 비롯한 몇 동지와 더불어 그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원기9년 2월에 대종사 첫 상경길에 동행하여 당주동에 임시출장소를 자비로 주선하고, 한 달 동안 곁에서 시봉하며 박사시화, 성성원, 이동진화, 김삼매화 등 서울 인연들을 모으도록 했다.

4월29일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창립 총회를 열어 종래의 기성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했다. 총회에서 대종사를 총재로 추대하고, 초대 회장에 서중안을 선정했다. 창립 총회 후, 대종사, 각지 대표를 데리고 이리 부근을 순시하여 총부 건설 기지를 택했다. 대종사, 총부 기지에 대해 소감을 밝혔다.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이 편리하여 적임지이다." 그리하여 원기9년(1924) 8월,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 344-2번지 땅 3,495평을 총부 기지로 확보했다. 기지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추산 서중안 대호법이 희사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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