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양 제일 오산, 대종사 구도 후원인 팔산

오산 박세철(호적명 경문, 1879~1926) 선진은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하고, 1919년(원기4)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으로 변산에 행가할 때 동행한 후 바로 영산으로 돌아와 구간도실의 수호를 책임 맡았다. 1925년(원기10) 전무출신을 단행하여 익산총부 건설에 잠시 함께했다.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우리 회상에 특색있는 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 중 박세철은 겸양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고 말했다.

최초의 9인 단원 중 오산 선진이 키가 가장 작았다. 어떤 사람이 9인 단원 중에 "박세철이 점잖다"고 하는 말을 들은 대종사는 "나도 오산이 제일 얌전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대했다. 

▲ 오산 박세철 선진.
생명 희생을 위해 칼을 갈다

원기4년 법인기도 당시 8월21일, 이전의 일화를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가 회고했다.
배코 칼(상투를 앉히기 위해 상투밑의 머리털을 돌려 깎는 데 쓰는 칼)을 저물도록 가는 것을 본 대사모는 조카(오산 선진)에게 물었다.

"뭣 하려고 번뜩번뜩 그리 칼을 가요?"
"암 말도 마시오. 오늘 저녁에 쓸라고 그러요."

아홉 단원들은 자결하는 일을 일체 비밀에 붙였다. 단장과 단원 아홉 사람 외에 아무도 이 비장한 결의를 알지 못했다.

혈인 기도를 마치고 각 봉우리로 가려는 단원들에게 대종사는 "생명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속히 돌아오라"고 하자 단원 중 한 사람인 오산 선진이 따지듯이 단장에게 물었다. "죽기로 했으면 죽어야지 왜 죽지 않습니까?" 칼을 갈며 목숨은 이미 내놓았던 것이다.

총독과도 바꾸지 않을 인물

오산 선진은 9인 제자 중에서 외형이 조금 뒤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대종사의 뜻에 조금도 거슬려 본 적이 없다.

한 사람이 대종사께 물었다. "대종사님의 9인 제자들은 다들 훌륭한 분들로 보입니다. 모두들 천지신명의 감응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박세철만은 그 용모나 학식이 좀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도 천지신명의 감응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대가 사람을 잘못 봤다. 세철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먼저 천지신명의 감응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그를 어느 국왕이나 정승과도 바꾸지 않겠다. 비록 조선총독이 굉장한 권력을 가졌다하나 나는 그를 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

"그렇듯 훌륭한 사람입니까?" "세철은 밖으로 나타난 외모는 비록 총독보다 못하겠지만 안으로 상(相)없는 마음과 희생적인 보살행은 총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인물이다." "아,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으로 속 깊은 사람이었군요. 제가 잘못 보았습니다."

대종사는 사람을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기준하지 않고 그 심법을 높이 평가했다.

오산 박세철의 열반

오산 선진은 원기10년 47세 되던 2월, 우연히 내종병(內腫病)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생을 했다. 그러나 양의(良醫)의 치료로 병이 차차 나아지고 있어 전무출신 할 좋은 시기라 생각하고 익산 총부로 나와 교중사업에 전무했다.

원기11년 대종사 사가가 전북 임실 삼타원 최도화 선진의 집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오산 선진은 팔산 선진과 함께 가사 전반을 돌보았다. 그러나 6월부터 내종병이 재발해 임실에서 한 달 가까이 신음했다. 7월에는 부득이 영산 사가로 귀가,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병근(病根)이 깊어져만 갔다. 자신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자손들을 불렀다.

오산 선진은 "나의 심신은 공중에 바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사가인물(私家人物)로 알지 말고 사후에도 교중의 지시를 받아 초상절차도 신정예법에 의하여 집행하라"고 유언했다.

임종을 지켜보는 정산종사와 삼산 김기천의 손을 꼭 잡고 비창한 어조로 "불초제(不肖弟)는 대종사님과 형님들을 길이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형님들께서는 부디 오래 사시어 공부사업을 잘 하시어 인도정의의 기초 확립으로 세계문명의 선구자가 되어 주시며, 불초제의 앞길을 선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최후를 부탁했다. 오산 선진은 원기11년 7월30일 48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 팔산 김광선 선진.
무아봉공의 화신, 팔산 김광선 선진

팔산 김광선(호적명 성섭, 1879~1939) 선진은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로 교단 창립에 정신·육신·물질의 3공덕이 구비하였으며, 알뜰한 혈심인물로서 대종사와 가장 허물없이 대하고 정이 깊이 든 제자다.

원기2년 7월 구성된 남자정수위단 구성에서 태방 단원에 입단했으며, 원기3년 방언공사에서는 제방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 몸으로 제방을 사수한 공심가이다. 총부·영광·마령·원평 등지에서 21년간 교단 창업의 중책에 오롯이 일심을 다해 왔던 팔산 선진은 원기42년 4월26일 제1차 법훈증여시 대봉도의 법훈을 받았다.

팔산 선진은 무아봉공의 화신이자 이사병행 영육쌍전의 사표로 교단사에 길이 빛날 창업 공덕주이다.

첫 제자, 대종사 구도의 후원인

팔산 선진과 대종사의 부모 대에는 교의가 깊었고 양가 가족간의 내왕이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1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부에 뜻이 있어 지기가 상통해 의형제를 맺었다. 타고난 근면과 성실로 길룡리에서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팔산은 대종사가 수양을 하느라 살림을 돌보지 못해 궁색하게 지내자 물심양면으로 살림을 보조했다.

1915년 구도의 열의 속에서 엄동설한 찬방에 변변한 이불도 없이 홀로 앉아 걱정에 잠겨있던 대종사에게 팔산은 매일 아침 아들을 시켜 조밥 한 그릇을 남몰래 갖다 주곤 했다. 대종사는 그것을 두 끼로 나누어 소금국에 말아먹었다. 또한 팔산은 선운사 근방에서 한약방을 하던 친지 김준상의 연화봉 중턱(심원면 연화리 산 77번지의 2)에 위치한 초당을 알선한다.

대종사는 연화봉에서 '3개월간 적공을 드렸더니 신력이 얻어져서 간혹 내왕하는 팔산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고 회고한바 있다. 팔산 선진이 38세 되던 해에 대종사가 오랜 구도 끝에 일원대도를 대각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서 광명이 일월 같고 원만해진 형모(形貌)를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된 팔산은 호형호제 하던 12살 아래의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된다.

법의대전

광산 김씨 문중의 족보를 수찬했던 팔산 선진은 한문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하루는 대종사가 팔산에게 말했다. "돌아오는 세상에 교법을 제정하려면 그 어려운 한문으로 경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언문으로 만들어야 될 것이요." 팔산은 그 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대종사는 "도덕은 문자 여하에 매인 것이 아니니, 부디 한문에 얽매이는 생각을 놓아 버리시오. … 우리 조선 글이 세계의 명문이 되는 동시에 우리 말로 편찬한 경전을 세계 사람들이 서로 번역하여 배우는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며 한문으로 된 경전보다 한글로 편찬한 경전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기2년 대종사 대각을 이룬 뒤 한 동리에서 같이 성장하며 교의가 두터운 팔산을 불러 붓을 잡으라 명하며 문구와 시가 등을 불러 주며 수필편집을 하게 했다. 초기의 이런 글을 모아 편집한 것이 〈법의대전(法義大全)〉이다. 원기5년 대종사는 변산에서 정식으로 삼강령 팔조목 사은사요 교강을 제정하고, 법의대전 등 제편에 대해 "저것을 두면 후 세상에는 모르는 사람은 미신으로 화한 게 그 책을 다 불살라라"고 말했다. 자기가 직접 받아 적은 것으로 애착이 각별했던 팔산 선진은 〈법의대전〉을 숨겨 놓았다. 그 이튿날 대종사가 "그 한 권은 뭐하러 남겨 두었소?"라고 말해, 팔산은 남김없이 불사르게 된다.

교단창업 멸사봉공

금주 단연, 근검 저축 등 방언조합 운동에 앞장섰던 팔산 선진은 원기3년에 길룡리 앞 개펄막이 방언공사에 동참하게 된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던 팔산 선진은 정신· 육신·물질 3방면으로 솔선 수범하며 제기며 절구통, 빨래 다듬잇돌까지 집안의 모든 것을 바쳤다. 방언 작답 후 제방의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침입하는 것을 발견한 팔산은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몸으로 물구멍을 막은 감동적인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동지들과 함께 엿 장사 등을 하며 물질적 근거를 마련한 팔산 선진은 이후 총부 농업부원, 총부감원, 영산 서무부장 등으로 봉직하며 물질적 근거를 이뤘으며, 일생 동안 교단창업에 무아봉공하다 원기24년 1월3일 영산교당에서 열반에 들었다.

회중과 대중을 위해 일생을 바친 팔산 김광선 선진. 불치의 병마에 신음하면서도 그는 측근의 가족을 물리치고 영광지부장 정산종사를 불러 돈 20원을 쥐어주며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법인성사의 이적을 나툰 8월이다. 원기100년을 맞아 제214회 임시수위단회에서 구인선진을 종사위로 추존하고 신앙의 축을 세웠다. 이에 본지는 정산종사 외 9인 제자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는 일산 이재철·사산 오창건 선진, 2주는 삼산 김기천 선진, 3주는 오산 박세철·팔산 김광선 선진, 4주는 이산 이순순·육산 박동국·칠산 유건 선진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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