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교화의 미래 희망차게 열어간다

항타원 이경순 종사
항타원 이경순 종사와 대구교당 교도들이 대산종사와 함께.

연 초 교구회의가 있어 다녀오던 길에 영화 한편을 보게 됐다. 이 영화는 천만관객 돌파를 한 '국제시장'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슴 뭉클한 장면과 대사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감동을 줬다.

'덕수라는 아이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위해 흥남부두에서 평생 후회로 남게 될 일을 겪게 된다. 부두에서 배로 올라타는 순간 덕수의 등에 업혀있던 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동생 막순이를 찾아 나선 아버지는 덕수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내가 없으면 장남인 네가 가장인거 알지. 가족들 잘 지켜라." 하며 생이별을 겪게 된다. 그리고 덕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부산에 있는 고모집으로 가게 된다. 이후 덕수는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독일 파견 광부에 지원,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러던 중 TV에서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죽는 줄만 알았던 잃어버린 동생을 가까스로 찾게 되는 기쁨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가족이 다모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 홀로 방에 들어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면서 나이든 덕수가 얘기한다.

"아부지! 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진짜 힘들었거든예."

이 장면과 대사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찡하고 기억에 남는다. 마치 교역자가 자신의 교화지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만족할 만한 교화성장을 이룬 후 퇴임하면서 대종사께 "대종사님! 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진짜 힘들었거든예." 하는 것으로 오버랩이 됐다.

이 영화를 보고 존경받고 감사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부모님들, 그리고 초기교단의 간고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오직 서원일념과 열정으로 교화했던 우리 선진들의 모습에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상도 교화의 초석 다져
항타원 이경순(恒陀圓 李敬順, 1915~1978)종사는 교화의 불모지였던 고향인 경상도에서 교화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15년 동안 동분서주하며 정성을 다해 교화의 꽃을 피워줬다. 지난해 11월에 구성교당에서 항타원 종사의 열반기념제사를 모시면서 장경진 원로교무는 항타원 종사를 모시고 교화했던 추모담을 전해줬다.

"김천에 출장 교화 할 때 대구에서 새벽밥을 챙겨드시고 시내버스 타고 오면, 교도들이 당신내 집 방 한 칸을 내주어 그곳에 터를 잡고,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곳이라면 비포장의 먼 길 마다하지 않았다. 시골 곳곳을 누비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법열로 그 사람의 처지와 환경에 맞게 무량법문을 내리셨다"는 설명이다. 항타원 종사의 법문말씀은 마치 메마른 대지에 꽃비를 적셔주듯 하셨다 하니, 한번이라도 법문말씀을 받든 사람들은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출장 법회는 밤 12시를 넘기는 때가 많았고, 그 다음 날 새벽에는 반드시 일어나 좌선과 기도를 잊지 않았으며 하루도 쉬는 법이 없었다 한다.

나는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잠시 어디 여행만 가더라도 잠자리가 불편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 뜬눈으로 지내게 된다. 하물며 정녀 교무님들이 교당도 아니고 교도님 댁에서 얼마나 불편한 잠자리였을까. 이는 오직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전한다는 일념밖에 없었기에 가녀린 여성의 몸이 아니라 '대종사님의 분신이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이렇게 걸음걸음 간절한 염원으로 마련해주신 교화의 터전인 김천교당은 올해가 50주년이 됐다. 항타원 종사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교화터전이니, 어찌 한가롭게 교화할 수 있겠나. 스승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더 보은하고 보은 할 것을 다짐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더 해진다. 항타원 종사는 대종사께서 "무사기(無邪氣)의 정기(正氣)만으로 뭉친 도인이 우리 회상에 왔다" 하며 기뻐한 제자이다.

어린시절 대종사 훈증으로 성장
1915년 6월6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에서 부친 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 1876∼1930). 모친 경타원(敬陀圓) 정삼리화의 8녀 중 7녀로 출생했다. 원기6년 당시 항타원 종사(호적명 경화)는 8살, 달타원 이정화 대봉도(호적명 한화)는 5살에 대종사를 만나 어린 시절부터 소태산 대종사의 훈증과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경북 금릉군 구성면 하원리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결혼한 이춘풍 선진은 전라도로 건너간 고종사촌인 정산종사 가족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영광 땅을 찾게 되었다가 대종사를 뵙는 순간 공자님을 뵙는 듯 황홀하여 감복하고 제자가 됐다.

이후 이춘풍 선진은 원기6년 전북 부안군 보안면 종곡리로 이사를 해 대종사께서 변산을 왕래하실 때 쉬어가는 곳이 되었고 시봉을 다했다. 이후 대종사께서 익산으로 총부건설을 위해 변산을 떠나면서 이춘풍 선진에게 봉래정사의 수호를 하게 하니 원기10년 이춘풍 선진 가족은 석두암 밑으로 이사해 산중생활을 하게 된다.

그해 여름 대종사께서 경화·한화 자매에게 경순·정화(正和)란 법명을 내려 줬다. 10세 무렵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어른들과의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리문답도 하게 된 것이다.

"천하에 제일 큰 것이 무어냐."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제일 크다 하느냐." "마음이 있어야 참선도 하고 불법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은 허공이 제일 크다 생각한다." "마음이 곧 허공이라 생각합니다. 허공은 형상이 없듯이 마음도 그러합니다." 부친 이춘풍 선진과 나눈 문답이다. 10세 아이 치고는 공부의 깊이가 있다. 이후 16세에 원기14년(1929) 전무출신을 서원한다. 당시 총부 형편상 이리 제사공장에 나아가 학자금을 마련, 원기20년(1935) 영산학원에 입학하여 5년의 수학과정을 거쳐 원기25년(1940) 서울교당 부교무로 교화일선에 선다.

이듬 해 개성교당 교무로 북한지역 교화를 했고, 원기35년 해방이 되자 남과 북이 갈리면서 훗날을 기약하고 초량교당으로 이동했다. 이때 부산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이차돈의 죽음'은 성황과 함께 지역교화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교도들이 대도정법에 회향했다. 원기41년에 3월, 대구교당 교감으로 부임해 삼덕동에 대지 70평 건평 40평의 한옥을 매입하여 봉불식을 거행한다.

대구경북 지역 교당 차례로 설립
15년에 걸쳐 서성로·봉덕·삼덕교당 멀리는 안동·김천·영주·성주교당까지 7개의 교당을 경북대학교 동아리까지 개척하는 등, 경북지방 교화의 기반을 일꿨다. 특히 항타원 종사를 오래 모셨거나 오래 모시지 않았어도 항타원 종사에 대한 인품은 '대구경북 교도들의 어머니이시오, 대자비관음보살로 자리하고 있다.

마침 올해는 항타원 종사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뜻 깊은 해를 맞이해서 대구경북교구에서는 원불교 100주년을 앞두고 '교화원류를 찾아 그 맥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8월23일 대구경북교구청에서 '대구경북교구 원불교 100년 교화대회 및 항타원 종사 추모법회'를 준비하고 있다. 대구경북 교화의 초석을 놓아준 항타원 종사를 통해 '현재를 새롭게 미래를 희망차게 열어간다'는 취지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행사 실무위원으로 준비하면서 16번의 회의를 통해 항타원 종사를 다 담아내고, 다 드러내드리고 싶어 준비위원회에서 실무위원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왔지만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이번 행사가 '교화의 원류를 찾자'는데 의의가 있다. 바로 항타원 종사님의 교화력을 본받고 거울삼아 원기100년을 새롭게 하고 대구경북교화의 미래를 희망차게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준비한 만큼 교화성장의 대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최용정 교무 / 김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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