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0

김성대 청년이 사법고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시 교무부장이었던 이광정 부장이 떠올랐다. 교무훈련 중에 교정원 각 부서가 사업보고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교무부장은 '박태선 장로는 주변에 법조인이 15명이나 있는데 우리는 청년 중에 법조인이 한명도 없어 걱정이다. 우리도 법조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보고와 고민하는 내용이 새삼 떠올랐다. 성대 청년을 어떻게든 우리 교단의 법조인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원을 세우게 되었다.

다음 고시에는 꼭 합격하게 해 달라고 우선 조석심고에 넣어서 간절히 기원하며 지냈는데, 고시 1차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다음 2차 본 고시는 2월23일부터 4일간 시험을 보는데 발표는 3월27일이었다. 당시 정초기도를 21일간 올리는데 김성대 이름을 맨 처음으로 명단에 올렸다. 사정을 들은 김해교당 원로 김법계화 교도는 당시 돈 5000원이라는 큰돈을 김성대 기도비로 내어주었다.

기도의 위력을 믿으면서 소소한 계문 하나도 철저히 지키고 화를 내는 일도 모두 위력에 방해될까봐 철저히 지키면서 일구월심 김성대 고시 합격을 위하여 빌고 또 빌고 법신불께 매달린 시간들이었다. 지금까지 기도생활을 해 오면서 그때같이 간절하고 일심을 다하여 올린 기도가 또 있었던가 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기도의 시간들이었다.

당시 대각개교절을 3월26일에 경축하던 시절이었다. 대각개교절의 큰 선물이 되어야 할텐데 초조하게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고 합격자 발표가 나와 있을 신문을 차마 가져다 보지 못하고 교도님 집에 가 있었다. 당시 간사근무를 하던 박혜철 교무한테서 전화가 왔다. "됐어요, 됐어요" 얼마나 고대하며 빌고 또 빌면서 기다린 소식인가. 인사차 찾아온 성대에게 그저 고맙고 소중해서 합격기념으로 원불교 금 배지를 달아주면서 "어떻게 시험을 잘 보았느냐?" 물었다. "제 힘으로 시험 본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정성으로 고시 준비를 했는데도 시험장에만 가면 앞이 캄캄하여 실력만큼만 답을 적을 수 었었는데 이번에는 시험을 보는데 머리가 맑아지면서 적어야 할 답이 환히 나타나는 위력을 보았습니다." " 모두가 선생님 기도 덕분인줄로 압니다." 감사를 표하는 김성대를 보면서 간절한 원은 법신불의 위력이 함께 함을 철저히 체험했다.

이후 한국사회 뿐 아니라 원불교에 꼭 필요한 법조인이 되어 달라고 평생을 기도했다.

퇴임을 맞아 후진들이 내 삶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42년'으로 정리했다. 원기46년(1961) 정식으로 출가하여 수학하기 시작하여 원기88년(2003) 69세로 퇴임하기 까지 교단봉직 42년은 내 생애에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42년 동안 가는 곳마다 출가의 소중한 인연이 되어준 16명의 후진들을 바라보면서 교단 구석구석에서 소중한 인재로 소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보람과 잔잔한 행복감이 자리한다.

대종사 교법 전하기에 나름대로 혈심다해 걸어온 전무출신의 길, 만고대법인 대종사 정법을 만나서 이 공부 이사업에 일생을 불사른 유감없는 시간들이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새벽이면 법당에 나가 앉아서 마음의 고향자리를 찾아가는 법열의 시간들…. 대산종사님의 구전심수 훈증과 역대 종법사님 모시면서 교단사 한쪽에서 묵묵히 살아온 시간들. 다시 '영생을 통하여 이 회상과 함께하리라' 원력을 굳게 세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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