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팀에 근무하는 직원 중에 독실한 교인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와 이야기 하다 내가 그에게 성경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심령’이 무엇이냐,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어떤 것을 말하며, 심령이 가난한데 왜 복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가 생각해 보더니 “잘 모르겠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교당에서 서로 간에 ‘마음 공부 합시다’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마음이 무엇이지?’ ‘공부’는 무엇이 공부이지? ‘마음공부를 한다’는 말은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

대종사님께서는 왜 원불교라는 종교를 굳이 새로이 개교하셨을까? 이 세상에 99개의 종교가 있으니 100개를 마저 채우기 위해서 개교하신 것은 아니셨을 것이고, 또 만인이 떠 받들어 주고 봉대하는 종교의 교조가 되기 위함도 아니심은 분명하였습니다. 개교의 이유를 생각한 것은 새로운 종교를 여신 필연적인 이유를 알아서 실행하여야 새로운 종교 원불교를 만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마하다 대종사님께서 답을 이미 정전에다 밝혀 놓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개교의 동기’가 그것입니다. 원불교의 개교 이유를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다른 종교들은 낙원으로 인도하려 하지 않았을까? 다른 종교도 신앙을 통하여 천당과 극락으로 인도하려 하고 있으므로 일체 생령을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종교를 개교하신 이유로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피니 그 앞에 분명히 밝혀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대종사님께서 굳이 원불교라는 종교를 창시하신 이유구나. 우리가 진리적인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인 도덕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원불교에 다녀도 별 실효가 없는 것이구나. 이것을 하지 않으면서 다니는 것은 미신적 신앙이요 편협한 신앙을 하는 것이고 전무후무한 대 회상에 참여하고도 그 공효를 얻지 못하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생활에서 실현해 내는 것과 마음 공부의 연관성에 대해 연마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원불교의 ‘공부’는 교리를 알고 외우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교전을 외우고 교리를 많이 알고 강연을 잘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이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공부’는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그 자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는 무시선 공부를 할 때 미신신앙과 기복신앙을 벗어나고 종교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평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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