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당에서 항타원 이경순(恒陀圓 李敬順) 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항타원 종사는 원불교 회상에서 교화의 빛나는 별이었다. 영남교화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대구경북 교화는 그로부터 비롯됐다.

이경순 교무는 원기 41년, 42세로 인생의 황금기에 대구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한다. 15년 동안 근무하면서 서성로·김천·안동·성주·봉덕교당을 설립한다. 대구경북교화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정산 송규 종사와 주산 송도성 종사 형제의 탄생지인 성주성지가 자리한 지역이지만 보수성이 강해 새 법이 정착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정산종사는 19세에 고향을 떠나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입문한 이래 63세 열반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교단사에 중대 고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산종사가 부산진교당으로 부임하는 윤주현 교무에게 당부한 말씀이 전해진다. "부산을 가려면 기차가 대구를 지나지야. 대구를 지나갈 때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심고 드리고 가거라. 대구로 인하여 우리 회상이 크게 거듭날 날이 올 것이다." 정산종사가 종법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쉽게 착수하지 못한 고향 교화였다.

이경순 교무가 대구경북지역에서 교화의 성공을 이룬 것은 그가 김천 사람인 영향도 컸다. 정산종사의 외사촌 형인 훈산 이춘풍 선진의 딸인 항타원 종사는 동생인 달타원 이정화 대봉도와 더불어 대구경북지역 교화에 심혈을 쏟았다. 지금도 대구경북지역은 교화가 어렵지만, 항타원·달타원 자매가 세운 기초가 워낙 탄탄하고 정산·주산 형제 여래불의 탄생지인 만큼 세월이 감에 따라 교화의 우담발화가 만개할 것이다.

이경순이 15세 어린 나이에 출가했을 때 대종사가 크게 기쁘하며, "경순이는 사기(邪氣)가 떨어진 정기(正氣)만으로 뭉친 도인이다"며 그 교화력을 인증했다. 전주 제사공장을 6년간 다니며 공부비용을 벌어 21세에 비로소 영산학원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우리 선진들은 이렇게 예비교무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개성교당 교무로 부임, 1950년 한국전쟁이 나기까지 9년간을 봉직하며 교화발전을 이루었다. 개성교당 교도들이 월남하여 주축을 이뤄 세운 교당이 종로교당이다. 부산 초량교당 교무로 부임해서는 피난온 교도들을 돌보았고, 서면·부산진 교당을 설립했다. 대구교화를 마친 이경순 교무는 다시 부산교당으로 부임, 교당 신축 불사를 진행하며 교화발전에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단아한 용모에 자비와 인정이 넘치는 항타원 종사, 그는 이차돈 성자에 비기고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불렸다. 설법에 능통하고 대하는 사람들을 불보살의 법력으로 감화시킨 이경순 교무는 원기 63년, 64세 가을에 교무훈련을 마치고 이어진 교정위원회 석상에서 순교(殉敎)한 전무출신의 표본적 인물이다. 세월이 흐른 오늘날 까지도 그의 훈도를 받은 수많은 재가 출가교도들이 교단발전의 주역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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