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활동의 보람

▲ 박혜훈 원무/밀양교당
'어둔 길 괴로운 길 헤매이다가 즐거이 이 법문에 들었나이다. 이 몸이 보살되고 부처되도록 나아갈 뿐 물러서지지 말게 하소서.' 원기85년 대각개교절에 신창원교당에서 입교식을 한 나는 이 성가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늘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시금 챙기게 하고픈 곡이다. 나는 당시 원경고등학교 박영훈 교장선생님의 인연으로 처음 '마음공부'를 접하게 됐다.

나는 입교한 후에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으나 교당에서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교당에서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당 청소봉사를 하다가 우연히 〈원불교신문〉 광고란에 만덕산훈련원 하선 소식을 접하게 됐다. 승산 양제승 원로교무와 함께하는 일원상 진리 공부라는 말에 무작정 훈련을 신청했다. 그 만큼 성리에 대한 목마른 갈증이 있었다.

당시 약 5시간이나 걸리는 낯선 길을 혼자 운전하며 훈련에 참가했다. 그런 내게 양제승 원로교무는 몇 시간을 꼿꼿한 자세와 살아 있는 형형한 눈빛으로 일원상 강의를 해주었다. 그 법문을 받드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충격이었다. 입교 후 지금까지 교당에서 누구를 붙들고도 속 시원하게 얘기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이곳에서 듣게 되다니 감동이었다. 이어지는 회화를 통해 '내가 곧 일원상이며, 나 자신이 곧 원만구족한 일원상 그 모습 그대로 부처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도반들의 생생한 신앙체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간 풀어졌던 나의 신심·공심·공부심이 다시 살아났다.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갈 에너지를 그곳에서 얻게 되었다.

이렇듯 원불교는 나의 생활과 생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날을 세우던 나에게 그 인연들이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그리고 늘 가슴의 가시처럼 묻어두고 있던,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와의 관계도 깊은 화해를 하게 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은혜는 어머니에 대한 일이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는 연세가 들면서 치매를 앓아 가족들을 점점 힘들게 했다.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당시 창원에서 살고 있는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식에 대한 기억도, 밥을 씹는 것조차도 다 놓아 버린 어머니를 붙들고 출근길 아침마다 발을 동동 굴리다 결국 속이 타서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어머니,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래요!" 순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보던 어머니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주름진 손을 내밀어 내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그랬다. 지금껏 나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부처를 찾기 위해 열심히 교당을 다니고 훈련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바깥세상을 바라보느라 정작 중요한 내 옆의 산부처는 까마득히 놓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내게 '은혜와 감사'라는 벅찬 선물로 채워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열반 2년 전, 입교를 하고 잠자 듯 편안한 모습으로 내 두 손을 꼭 잡고 '나무아무타불'을 염송하며 열반에 들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나는 새벽좌선을 시작했고, 좌선에 재미를 붙이면서부터 보좌교무 없이 교당과 기관을 이끌어 가야 하는 교당 교무의 힘듦을 알게 됐다.

당시 밀양교당 권화정 교무의 적극 추천으로 원기96년 4월1일 원무사령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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