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공부를 오래 했다는데 오히려 자기 밖에 모르고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 표준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중요하죠. 종교가에서는 바른 법과 스승에 줄 맞는 믿음과 수행을 강조합니다. 그래야만 순리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이죠.

원불교에는 마음공부의 표준이 정확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동그란 일원상과 같은 마음으로 일원상을 닮은 일거수일투족의 삶을 살아나가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일원상을 닮은 마음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일원상을 닮은 삶일까요?

〈정전〉 '일원상법어'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 이 원상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수행을 잘 해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을 하나의 집안 삼게 됩니다. 결혼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부부, 형제, 자녀, 친척만이 내 가족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인류와 생명을 내 가족으로 여기게 되는 거죠.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됩니다.

하나의 가족뿐 만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몸으로 둘이 아니죠. 개별적으로는 각각의 독립된 이름을 갖지만 전체로는 하나입니다. 마치 코끼리 귀, 꼬리, 몸통이 각각의 명칭을 갖지만 크게 보면 한 마리 코끼리이듯이, 또는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별개의 섬으로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결국 서로 연결된 하나이듯이 말이죠.

이 하나의 가족, 하나의 몸 전체를 우리 안에서 찾아보면 바로 본래 마음입니다. 깨달은 모든 부처와 성현의 마음이자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과 생명들의 본래 마음이죠. 그 모습을 한 눈에 볼 수는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서 늘 끊임없는 변화와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실체인 겁니다.

모든 생명의 생로병사의 변화 또한 일회적인 것 같지만 춘하추동 사시가 순환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래하며 윤회하고, 그 오고 감에 있어서의 차별된 모습은 음양상승과 같은 인과의 이치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보응의 결과죠. 세상의 모든 차별적 모습이 누군가의 직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은 바대로 윤회하고 순환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이 비록 온갖 차별적 모습을 띄고 있지만 편파적이거나 불충분하지 않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변화의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세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거죠.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이해와 시비가 갈릴 뿐입니다.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진리를 그대로 체 받아서 눈, 귀, 코, 입, 몸과 마음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사람이죠. 공부를 하고 계신가요?

몸과 마음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잘 하고 계신 겁니다. 다른 사람이 공부 안하는 것이 보인다구요? 공부의 표준을 점검해야 할 시점입니다.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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