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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신 원로교무 1 / 아버지 지극한 발원과 어른들의 숨통
김보신 원로교무 1 / 아버지 지극한 발원과 어른들의 숨통
  • 정리=이성심 기자
  • 승인 2015.08.28
  • 호수 17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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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대불공 31
▲ 김보신 원로교무
원기24년 김일선 교도의 연원으로 도양교당에서 입교한 김보신(曾陀圓 金普信) 원로교무. 그는 "대종사님을 7살 무렵에 뵌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구체적으로 생각 나지는 않으나 다녀간 적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신심이 대단했다. 대종사님을 숭배하는 마음은 말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도양교당을 창립하셨는데, 처음에는 우리가 살던 신하리에 지으려 했다. 그러나 신하리에 있던 '신 씨'라는 분이 워낙 깐깐하고 과격함이 있어 동네를 거느렸다." 대종사께서 "그곳을 교당 터로 정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하라"고 아버지께 말씀하셨기에 도양으로 정하게 되었다.

내 나이 8살 때였다. 아버지의 생활은 오직 집, 교당, 농사 이 세 가지를 아울러 돌보셨다. 우리 집에서 농사짓던 조카사위인 조지성에게 아버지가 권하셨다. "도양교당 한 쪽에 자네 집, 또 한 쪽에 우리 집을 지어서 자네와 내가 3년만 교당을 수호하세." 그렇게 집 두 채를 지어서 양쪽 집에서 교당을 관리했다. 교당에 대밭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대밭을 관리하시며 대나무를 베어다 팔아 유지 경영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사 온 도양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었다.

아버지는 훈련을 나시며 대종사님을 뵙고 이 회상을 알아보셨다. 그래서 자식에게 전무출신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 회상이 훌륭한 회상이다. 전무출신함이 어떠냐?" 하고 권유를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나는 도양교당 교리강습에 참여했다. 이 때 조일관 선진님이 인과에 대해 설법을 하셨다. 어린 나이임에도 인과법문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권유와 후원 속에 출가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도양교당 교무님이 "광주로 가서 근무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15살에 광주교당에 가서 1년 간사근무한 후 다시 사가로 왔다. 그리고 이듬해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따라 초량교당으로 갔다. 그 때 초량에서 다대교당을 짓게 되었다.

박은섭 선진을 모시고 다대교당에 가서 처음으로 살림을 시작했다. 이 분은 척추병으로 많이 편찮으셨다. 많은 시간 누워 계셔야 했다. 그래서 살림의 대부분을 도맡게 되었다.

내 나이 18살까지 다대교당에서 근무했다. 내 생각에도 참 어린 나이였는데 살림에 대한 생각이 팍팍 돌아갔다. 고생은 많이 했으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 기간이었다. 다대교당에 있을 때 대산종사께서 6개월간 치료차 오신 적이 있다. 이 때 점심을 싸 드리곤 했다. 3년간 그렇게 간사근무를 했다. 그리고 원기38년에 총회가 있었는데, 그 때 공부하러 익산으로 왔다. 동산선원에서 2년간 공부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원광대학교 청강생 모집을 한다고 했다. 이 때 젊은 사람들 10여명이 원대로 이동해 왔다. 나도 자취생활을 하며 총부에서 살았다. 간사근무를 오래 했어도 공비생이 될 수 없었다. 너무 없던 시절이라 그랬다.

잠은 기숙사에서 자고 밥은 총부 기숙사 마당에서 따로 해먹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2년 살다가 3학년 되면서 공비생이 되었다. 공부를 하다가 4학년, 졸업도 하기 전에, 이성신 선진님을 모시고 광주교당으로 가게 되었다. 이성신 선진님이 나와 함께 꼭 가고 싶어 정산종사님께 부탁을 드리신 것이다. 정산종사께서 부르셔서 "공부하는 도중이지만 이성신이 그렇게 말하니 가도록 하여라"라고 하셨다. 이 때 청년회 조직을 했다. 학생회는 원래부터 있던 교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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