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여래 천보살에서 천여래 만보살 시대로

〈정전〉 교의편 제7장 사대강령에서 '무아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말하고 있다.

수행편 무시선법 중에서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 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대승선(大乘禪)이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니라', 참회문에서는 '이러한 사람은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하고 대승이라는 문자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유투브에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는 원불교 〈정전〉을 강의하면서 "원불교는 대승 불교의 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소승(小乘)이고 대승(大乘)인가?

일반적으로 소승과 대승을 해석 할 때는 적게 타는 것을 소승이라 하고 많이 타는 것을 대승이라고 하는데 이는 글자를 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전거는 자동차에 비하면 소승이요, 자동차는 기차에 비하면 소승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남방불교는 소승불교이고, 북방불교는 대승불교라하고 미얀마 타이 등지의 불교를 소승, 중국 한국 일본 불교를 대승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남방불교 소승불교에서는 대승불교를 말하지 않는다. 소승이라는 말은 북방불교가 남방불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만든 용어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창시자를 신격화한다. 신격화하는 이유는 '나'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소승(小乘 Hinayana)불교의 최종 목적은 아라한(阿羅漢 Arhat 평범한 사람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즉 이 말은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부처는 되지 못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승은 부처를 신격화해 놓고 일반인들은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부파불교(붓다가 입멸한 후 100년경에 계율의 문제로 교단 내에 보수파와 진보파가 서로 대립하다가 마침내 분열되었는데,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라 하고 진보파를 대중부(大衆部)라고 함)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 1차 결집 시에 계문을 두고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쪽(상좌부)과 시대에 맞게 융통성을 두자는 쪽(대중부)으로 갈리게 되었다.

정산종사는 "대종사께서 '과거 회상은 일여래 천보살 시대였으나 앞으로는 천여래 만보살이 출현하리라'하셨나니라(〈정산종사법어〉원리편6)"라고 밝히고 있다. 대종사님은 누구든지 노력하면 모두 여래위가 될 수 있다고 한 반면 소승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라한의 경지에 오를 뿐 여래는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본래의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궁극적인 목표는 여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대승은 일승(一乘)으로 탈것은 하나 밖에 없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며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인 것이 대승인 것이다. 출가와 재가를 구별하면 소승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승은 큰수레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무아(無我)가 되는 것이며 보살(菩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보살이라는 개념이 잘못 쓰여지고 있다. 보통 절에 다니는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보살의 뜻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그 뜻은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 '구도자', '지혜를 가진 자' 등으로 풀이된다.

처음에는 석가모니 한사람에 한했지만은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을 제도하는 다수의 보살이 등장하고 있다. 대승에 있어서 보살은 아주 핵심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출가자에게만 국한 되었다면 보살은 출가, 재가,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가 신도들에게 법복과 법락을 주지 않는다. 법복과 법락은 스님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원불교는 재가 교도들에게도 일정한 자격 규정을 마련하여 공식적으로 출가와 같이 법복과 법락을 주고 있다. 이면에서 보면 불교는 소승이요, 원불교가 진정한 대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원불교 교단의 최고 의결 기관인 수위단회에도 재가 교도가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타 종단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며, 재가와 출가를 구분하지 않고 각자의 공부 성적과 사업 성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대승 사상이 제도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소승의 아라한의 궁극은 정정(正定smayak-samadhi)의 삼매(三昧)가 핵심이라면 대승의 핵심은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보살의 개념으로 육바라밀의 최종 목표인 반야 지혜(쁘라기냐)를 깨달음으로 이뤄진다.

이 지혜를 얻은자만이 회향(回向)이 가능한 것으로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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