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회상 펼친 선진들의 땀방울, 엿사업과 과일농사

▲ 수계농원과 이흥과원에서 복숭아를 재배했다. 과원은 영육쌍전의 정신을 꽃피운 중요한 사업이다.

초창기 교단 음식에는
교단 세부 사정과
선진들의 간난한 생활상 담겨

우리 교단 100년의 역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할만큼 기적같은 성장이자 발전이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9인 제자는 물론, 세상을 구할 깨달음과 진리를 알아본 선진들이 100년만에 지금의 교단을 만든 것이다. 그 속에는 시대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 굶주리면서도 콩 한쪽도 교단으로 스승으로 돌리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가난과 배고픔은 교단 초기 역사의 배경 음악과도 같았다. 100년에 있어 음식 문화가 정리되지 못한 이유도, 집대성할만큼 풍부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사〉나 예화, 그리고 재가 출가교도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음식 이야기 속에는, 우리 교단의 간난했지만 충만했던 역사와 선진들의 정신문화가 들어있다.

총부, 본원실과 함께 최초로 '엿집' 지어

교단의 가장 오랜 음식은 '엿'이다. 당시 어려웠던 한국사회에서 엿은 몇 안되는 간식이었으며, 고물과 같은 물물교환의 화폐단위로 쓰이기도 했다. 일부 부유층에서 음식에 설탕을 넣어 단 맛을 내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 중반이었으니, 그 즈음 엿은 희소성 있는 사업 소재였다. 송적벽의 발의로 시작한 엿사업은 거의 모든 선진들이 발벗고 참여해, 〈교사〉와 법문 속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엿사업은 당시 없던 살림 중에서도 공적인 재산이었던 바, 하루는 엿과 엿 목판을 잃어버리는 일로 〈대종경〉 실시품 4장과 12장 등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원기9년 건설 중이던 총부에서는 본원실과 함께 최초로 '엿집'을 지어올려, 당시 엿사업의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61㎡ 정도의 1간짜리 건물로 곡주형이라 '꼭두마리집'으로도 불리던 엿집은 이듬해 6월 폐하기까지 총부의 벽돌과 서까래가 됐다. 이후 이 건물은 식당과 사무실, 여자 숙소를 겸했고, 원기58년에는 세탁 업무를 담당하는 세탁부로 쓰였다가 현재는 복원중이다.

엿 제조업을 주로 이끈 것은 팔산 김광선이며, 모두가 엿판을 메고 행상을 다녔다. 어떻게든 팔아 이익을 교중에 보태는 것에 한 마음이었으니 부끄러워하거나 저어할 줄도 몰랐다. 엿방에서는 늘 단내가 났지만 선진들은 엿을 짜고 또 짠 뒤 남는 엿밥 찌꺼기를 주식으로 삼았다. '이박(飴粕)'이라고도 불리는 엿밥은 당분이 다 빠졌기 때문에 점성이 전혀 없어 오직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다. 엿사업은 품 들이는 것에 비해 이익이 박해 6~7년 밖에 이어지지 못했으나, 교단100년의 영광을 만든 바탕에 뚜렷이 기록되고 있다.

초기 교단 정신을 상징하는 '엿'에 대한 후일의 일화도 전해져온다. 원기38년 제1대 성업봉찬대회가 끝난 어느날 항타원 이경순이 찹쌀엿을 사들고 총부 야회에 나타나 이렇게 전한 것이다. "이 엿에는 익산 총부 건설 당시 우리 선진님들의 얼이 깃들어 있습니다. 엿이 서로 한 덩어리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듯, 우리 재가 출가 선후진도 한 덩어리로 강하게 화합해야 하겠습니다."

대종사, "겉보리 넉 섬 무엇으로 갚을래"

총부 초창기의 식사는 엿밥과 아카시아 잎 반찬이었고, 출장을 갈 때는 그 사정이 더욱 박했다. 밖에서 사먹을 수 있는 빵이나 간단한 식사가 5전이었는데, 1928년 경성 시내 시내버스 요금이 7전이었으므로 현재로 가늠해보면 800원 정도다. 그러나 이를 아끼기 위해 모두가 강밥가루를 싸가 냇가에서 물과 함께 먹었다. 대종사가 부안 봉래정사에서 영산으로 내왕할 때는 보따리 속에 숙박을 위한 노비 10전과 강밥가루 몇 줌, 표주박 한 개가 담겨있었다고 김형오 교도가 회고한 바도 있다.

잔잔하면서도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일화 속 음식들은 그 자체가 공부거리였다. 원기9년은 심한 가뭄으로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했던 해였다. 어느날 양하운 대사모와 여청운 정토가 누가 몰래 마당에 놓은 겉보리 넉 섬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대종사가 두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고, 오히려 대종사는 "겉보리 넉 섬 무엇으로 갚을래?"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양하운 대사모는 옥녀봉 밑 밭 한마지기를 팔고, 여청운은 키우던 돼지를 팔아 갚았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예화가 또 있다. 양하운 대사모가 아들 광령, 광진을 데리고 예회에 참석했을 때, 점심때가 되었는지라 제자들은 대사모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하운이, 밥 먹지 말고 집에 가거라. 빚지지 말고"라고 말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또한 〈교사〉 속의 음식은 공과 사를 구분하고 가르치는 예화로 많이 쓰인다. 양산 김중묵이 화해교당에서 씨감자를 얻어와 심는 와중에 썩은 것이 있어 하나를 먹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대종사는 "감자 좀 얻어와 심으려는데 인(人)쥐가 먼저 먹더라… 중묵이 저 놈이 바로 인쥐 노릇을 하고 있더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영육쌍전, 이사병행 피워낸 과수원들

이후 선진들은 당시 유망한 신농업인 과원(과수원) 농사에 뛰어들었다. 초기 교단 산업기관은 총부 산업부를 비롯해 이흥과원, 삼례과원, 금산과원 네 곳이었는데, 영광읍 동편 4km 지점에 있던 이흥과원은 원기19년 39,600㎡의 땅을 매입해 사과나무로 터를 닦는다. 총 26년동안 운영된 이흥과원의 전성기는 원기32년 형산 김홍철이 이끌었다. 사과와 복숭아, 배 등 1천주를 지었으며, 임직원이 많을 때는 15명이나 됐다.

과원은 교단의 영육쌍전과 이사병행 정신을 꽃피우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총부에서는 작농, 양잠, 축산, 원예와 함께 황무지 개간으로 복숭아를 지었으며, 영산과원(사과), 만덕산농원(감), 황등농원(밤) 등 지방 여러 곳에서도 과원을 운영해 기금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수계농원은 원기25년 완주군 삼례읍 수계리 231,000㎡의 야산에서 시작됐는데, 삼례과원, 삼창과원이라는 이름을 거친다. 그러나 복숭아 통조림 공장 실패에 따라 존폐문제까지 대두된 후, 원기38년 '수계농원'으로 명칭을 고쳐 양계와 양돈 등 유축농원으로 전환했다. 원기43년에는 인삼 재배로 수익을 올리기도 했으며, 육영재단 '은산재단'을 설립하며 장학금을 내놓기까지 이른다. 이렇게 수계농원은 반백년 역사를 통해 80여 명의 교역자를 배출한 인재양성의 도량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있었던 과원이었으나, 선진들은 한 그루 한 알에 정성을 다했다. 선진들은 스승의 법문을 받들고 공부하는 한편, 엿방과 과원 현장에서 이를 실천하고 또 확인받는 기쁨으로 살았다.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빈천했던 시기였던 교단 초기, 가진 것 없던 선진들 역시 누구나처럼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음식 기록 속이나마 늘 법열에 젖어 행복했던 선진들의 모습이 곳곳에 배어있다. 개인의 불편보다는 이 회상의 미래와 희망으로 배를 채우던 교단 초기의 땀방울을 다시 기억해야 할 원기100년이다.

원불교 음식 문화는 시대적 상황이나 초기 간난했던 사정으로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10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기간과 이해가 온전히 가능한 기록이라는 장점에서 보면 발췌나 그 정확도는 높다. 원불교100년을 맞아 교사와 예화 속 음식에 대한 기록을 통해 교단 초기의 근검절약 정신과 공사를 분명히 했던 선진들의 자세,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낸 방언공사 정신을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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