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

이타원 장적조(二陀圓 張寂照, 1878∼1960)는 초기교단 삼대여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장적조는 부산 교화의 시조요 대륙(만주 목단강) 교화를 펼쳤던 주인공이다.

그는 경남 통영 사람으로 16세에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낳고 넉넉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과 이상이 맞지 아니할 뿐더러 선천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을 가진지라 한 가정에서 구속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구구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던 중 30세 가까운 어느 해에 단호히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보따리 하나를 들고 전라도로 발길을 옮겼다.

처음에는 황화(荒貨) 장사 모양으로 돌아다니다가 증산교에 들어가 몇 해 동안 열성으로 믿었다. 어느 날 우연히 원평에서 완타원 이만갑을 만나 생불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발심이 났다. 원기 6년(1921) 5월 15일 이만갑의 안내로 변산 실상초당을 찾아 대종사 법하에 귀의했다. 여자로서 18번째의 제자가 되었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장적조의 신성은 대단했다. 봉래정사를 지을 때와 영산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을 영산원으로 옮겨 지을 때에는 여자의 몸으로 흙짐을 지고,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하는 등 남자들이 하는 일을 조금도 기탄없이 했다.

무엇보다 장적조의 연원교화는 교단 창립에 큰 공적이 되었다. 생불님을 만난 신바람으로 사방 천지로 순교(巡敎)하고 다녔다. 원평에서 한약방을 하는 춘산 서동풍과 그의 동생 추산 서중안을 입문시켜 익산 총부 건설의 주역이 되게 했다. 또한 증산교의 교파인 태극도(대순진리회의 전신)의 창시자 조철제 일가의 안식구들을 개종시켜 대종사의 제자가 되게 했다.

원기 14년(1929) 봄, 부산으로 내려간 장적조는 아들 집에 살면서 순교 활동을 펼쳐 부산땅에 일원의 법종자를 심었다. 워낙 붙임성이 좋아 누구든 만나면 손금을 봐준다느니 사주를 봐준다면서 사람들의 한 맺힌 통사정을 듣게 되고 마침내 교법을 전했던 것이다. 훈타원 양도신의 부친인 양원국 등 36명을 입교시키고, 양원국과 함께 낙동강 하구인 하단(현 당리교당)에 회관을 마련했다.

원기 16년(1931) 가을에는 대종사를 부산으로 초청했다. 대종사가 경상도 땅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불법연구회 회장 경산 조송광은 그의 연대기(年代記)인 〈조옥정백년사(曺沃政百年史)〉에 "장하고 기쁘도다. 장적조씨여. 전후좌우로 종사주를 시위한 남녀노소 태을선관(太乙仙官) 하강한 듯 날마다 법문과 가입서 기재에 분망하다. 백여명 입회에 관광자 불가수(不可數)라. 이는 모두 적조선생의 설단(舌端)으로 생활로를 찾은 사람이다."고 칭송했다.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는 원기 22년(1937)부터 원기 30년(1945)에 걸쳐 북만주에 진출, 선양(審陽), 지린(吉林), 무딴장(牧丹江) 창춘(長春) 엔지(延吉) 등에서 2백18명을 입교시켰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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