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 김준영 교무
살아갈수록 세상은 크고 나는 작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 짧은 소견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좋고 싫음을 분별하여 좋은 건 더 가지려, 싫은 건 피하려 하니 걱정과 두려움, 괴로움과 불만족이 끊일 날이 없죠.

저 또한 그랬습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한 생각에 바쁘고 숨가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죠. 무슨 일이든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무리를 하고, 공금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인색하게 굴면서,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일 처리를 하려다보니 주위 사람들에게도 본의 아니게 요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아니, 준영 교무는 며칠 살다가 죽을 사람처럼 왜 그렇게 호흡이 가빠요? 길게 보고 가세요."
보다 못한 상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는 뭐가 잘못되었는지조차 몰랐죠.

세월이 흐르고 마음에 여유를 찾게 되면서 비로소 사람마다 다른 마음의 크기와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고 넓게 볼수록 마음이 여유롭고 넉넉해진다는 것이지요.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개미집 같은 저 곳에서 뭘 그리 아등바등 할 것인가?' 싶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많은 불안과 고통, 상심과 분노 등은 우리의 안목에 크게 좌우되죠. 욕심이 많거나 집착이 강하고, 어리석을수록 전모를 못보고 자신의 짧은 소견으로 일희일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 전모가 보이죠. 전모를 보아야 우리는 보다 지혜롭고 원만하고 넉넉해집니다. 전모는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전모를 볼 수 있을까요?

원기26년 1월,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후세에 법을 전하는 게송의 형태로 화두를 던져주십니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있는 것은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변화가 끊임이 없으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텅 비었다 할 수 있고 아무리 변화한다 하더라도 어디로 간 바가 없으니 꽉 찼다고도 할 수 있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죠? 그러니 이 자리는 말로 설명해서 알아내려하기 보다는 관조로서 깨쳐 얻어나가야 합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이 세상은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세상사 모두 스쳐가는 바람이죠. 그 바람 또한 좋고 나쁨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은혜에서 해악이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해악에서 은혜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좋고 나쁜 것에 집착하여 좋은 것을 가지려 욕심 부리고 싫은 것을 피하려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단지 '온전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정답은 없죠.

그래서 성현들은 '평상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쁘다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님을 아셨던 거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어서 크고 작은 경계에 너무 일희일비 하지 맙시다. 눈앞의 이해에 너무 전전긍긍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는 거죠. 즐거운 일을 당해서도 교만하지 않고 보은을 생각합시다. '광풍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폭우는 온종일 내리지 않는 법' 이니까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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